아동권리 콘텐츠
아동권리 콘텐츠 시대로 보는 아동 역사

한국의 고대는 고조선, 부여, 옥저, 동예 등의 부족연맹 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되었던 시대 그리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공존한 남북국 시대를 모두 아우른다. 그 중 ‘고대국가의 아동’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통일신라 아동의 삶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

삼국은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유학과 불교의 기반 위에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주변국과의 경쟁과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해갔다. 그리고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676년 이후부터 935년 고려에 스스로 항복을 하기 전까지 삼국의 문물을 종합하여 한 차원 높은 민족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동관

성인기와 구별되는 아동기의 연령경계는 보통 결혼, 경제적 자립, 지역사회 참여 등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어야 부모 혹은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는지로 결정된다. 삼국과 통일신라는 보통 그 연령경계가 대략 15세 즈음이었지만, 이 시기가 무려 1,000년이 넘는 기간인 만큼 연령경계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였음은 물론이다.

우선 삼국시대를 보면, 신라인 파로의 딸 벽화와 고구려의 평강공주는 16세에 결혼을 하였고, 신라 진평왕은 15세인 비형랑에게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내렸다. 화랑 사다함과 관창은 15-16세 때 군인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국가를 위해 싸웠다. 그리고 성을 쌓거나 궁전을 수리하는 일에 동원된 자의 연령을 보면 15세 이상의 남자들이었다. 즉, 삼국시대의 사회는 아이가 15세가 넘으면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을 책임지고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삼국시대 아동기는 15세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사회․경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신라촌락문서』를 보면, 통일신라는 삼국의 아동과 성인의 연령경계를 받아들였고, 나아가 아동기를 세분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는 인구의 연령을 각종 부역과 요역을 담당했던 정(丁, 성인)을 중심으로 6개의 등급(소·추·조·정·제·노 ; 小·追·助·丁·除·老)으로 구분하였고, 연령 등급의 첫 단계인 ‘소(小)’는 다시 ‘3세 이하 소’와 ‘4세 이상 소’로 나누었다. 등급별 연령 기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연령 등급의 중심인 ‘정’의 시작 연령을 15-16세로 보는 경우와 20세로 보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에 따라 아동․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소’, ‘추’, ‘조’의 연령 구간에 차이가 발생한다. 즉, ‘정’의 시작 연령을 15-16세로 보는 경우, ‘소’는 1-9세, ‘추’는 10-12세, ‘조’는 13-15세로 추정한다. 그리고 ‘정’의 시작 연령을 20세로 보는 경우, ‘소’는 1-11세, ‘추’는 12-14세, ‘조’는 15-19세가 된다.

삼국과 통일신라는 아동․청소년 연령 중에도 ‘추’와 ‘조’의 연령 구분의 경계를 짓는 12세, 15세를 중요한 연령 분기점으로 생각했다. 삼국 사회는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 우조가 7세 때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이를 우연한 결과로 생각했다거나, 주몽이 7세 때 백발백중의 활 쏘는 실력을 특이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치부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삼국 사회가 10세 이전의 아동들에 대해서 무엇을 할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족한 존재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데, 10세가 넘어가는 아동 관련 사례들을 보면 인식의 변화가 발견된다.

‘따라다니다’의 뜻을 지닌 ‘추’는 ‘소’와 ‘조’ 사이의 존재하는 연령 등급으로, 추가 따라다닐 대상은 ‘조’이다. 그러나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고, 진표가 승제법사 문하에 들어가 출가하기를 결심했던 연령이 12세였으며 이를 가족으로부터 허락받았다는 것은 ‘추’가 비록 ‘조’를 쫓는 어린 연령이지만 사회적으로 자신의 장래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연령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소년에 해당하는 연령 등급인 ‘조’는 ‘정’, 즉 성년이 되기 전 성인의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여러 지식과 기술을 훈련받는 동시에 유사시 국역에 동원 가능한 예비사회인이었으며, 입학과 입사 그리고 결혼 등을 시작하는 적령기로 간주되었다. 실제 15세가 되면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15세였던 나마긴주 아들 능안과 왕족 김응렴 등이 국가 연회에 참석하여 축하무를 추고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등의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왕족 김응렴은 15세에 헌안왕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교육

삼국은 고대사회로부터 내려온 전통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유학을 접목하여 교육과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교육과정을 통해 문무를 겸비하고 인효(仁孝)의 사상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여 영토확장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이 372년에 15세 이상의 귀족 자제들을 위한 국립 교육기관 ‘태학’을 설립하였고,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은 15세에서 20세에 이르는 미혼자제들은 사설교육기관인 ‘경당’을 다녔다. 신라는 576년 진흥왕 때 풍류도를 바탕으로 심신수련을 하던 청소년 단체들을 중앙에 흡수하여 ‘화랑도’로 발전시킨 뒤,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신문왕이 682년에 설립한 ‘국학’이 있었다. 국학은 아직 벼슬이 없거나 대사(大舍) 이하의 벼슬을 하고 있는 15-30세 연령의 귀족남성들에게 9년의 교육과정(유학과, 기술과)을 제공하였고, 수업을 쫓아가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퇴학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다.

백제의 교육기관에 대한 국내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근초고왕 통치 당시 박사 고흥이라는 인물의 존재, 무열왕과 성왕 때 일본으로 파견한 오경박사라는 관직의 존재, 백제 학자 왕인·아직기가 일본 태자에게 『논어』와 『효경』을 가르쳤다는 사실 그리고 당나라로 갔던 백제 유민 ‘진법자’의 묘비에서 발견된 ‘태학(太學)’이라는 기록 등을 통해 백제에도 공적인 교육기구가 존재하였으며, 타국에 학자를 파견하여 유학을 전파할 만큼 그 수준이 매우 높았다고 추정된다.

고구려의 태학이나 통일신라의 국학은 모두 도덕정치, 왕도정치에 입각한 국가 수립을 표방하고 이에 합당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국립 교육기관이다. 그리고 두 기관 모두 국왕 중심의 관료제에 적합한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논어』와 『효경』을 핵심 교재로 사용하였다. 『논어』와 『효경』이 교육의 기초가 되고 인재양성의 핵심 교재가 된 이유는 『논어』가 인(仁)의 실천에 바탕을 둔 개인의 인격완성과 예(禮)로 표현되는 사회질서 확립을 강조하고 있고, 『효경』은 유교 윤리의 핵심인 효(孝)의 원칙과 규범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삼국과 통일신라의 학생들은 『논어』와 『효경』에 따른 도덕 윤리의 기초를 세웠고, ‘인효(仁孝)’를 중심으로 한 유교의 전문 지식들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습자용 논어 목간(木簡)을 가지고 다니면서 반복적으로 글을 쓰다 지우고 다시 쓰면서 글을 익히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부여 능산리 사지-'보희사'명 목간
부여 능산리 사지-'보희사'명 목간

1. 유물 열람 신청 담당자 김보상(055-211-9017, bks9343@korea.kr)

2. 자료 복제 신청 담당자 안경화(055-211-9022, moakh@korea.kr)

경당과 화랑도는 왕권강화와 정복전쟁에 투입될 인재를 양성할 필요성을 느낀 고구려와 신라가 기존의 촌락공동체적 청소년 단체들을 국가의 체제 속으로 흡수․개편하여 만든 교육기관, 교육단체였다. 그리고 경당과 화랑도는 태학과 국학이 고위 귀족자제들만의 교육기관이었던 것과는 달리 여러 계층의 자제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였다.

고구려 청소년은 경당을 다니면서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담은 경서(經書)를 통해 기본적인 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예법, 음악, 활쏘기, 말타기, 권박, 검술 등의 육예(六藝)를 읽히고 연마하였다. 화랑들도 『시경』, 『예기』, 『춘추』 등의 경서들을 읽으며 지적 함양을 도모하였고, “도의로서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수를 즐겨 찾아다니며 유람”하였다. 백제의 경우, 경당과 화랑도와 같이 청소년에게 문무(文武)를 전수하는 기관 혹은 단체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주서』 백제전의 “(백제의) 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고, 경서와 사서를 애독하였다. 그 중에 뛰어난 사람은 자못 글을 지을 줄 알았다.”를 통해 백제 또한 고구려와 신라와 마찬가지로 문무를 갖춘 청년들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고대국가의 청소년들은 유학을 통해 실천적인 정치이념을 습득하고, 유사시 군인으로써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무사적 교육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놀이와 활동

고대국가로 발돋움했던 삼국은 국내․외 주변국과 잦은 전쟁을 치루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이러한 상황은 아동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동들은 일상에서 활쏘기, 말타기, 창던지기, 격구, 씨름, 돌팔매질 등과 같은 놀이들을 통해 강인함을 기르고 직․간접적으로 전쟁기술을 배워나갔다.

왕권이 강화되고 제도가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삼국의 놀이행위는 철제농기구의 발달로 성장한 농경문화와 명절에 접목되었고 점차 세시풍속으로 전환되어 갔다.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편을 먹고 돌팔매질을 했던 석전(石戰), 5월 단오날의 씨름, 추석의 활쏘기와 길삼놀이 그리고 청소년들이 옥수숫대 혹은 볏짚 따위로 거북이 모양을 만들어 쓰고 마을 집집마다 찾아다녔던 거북놀이 등의 세시풍속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거북놀이 (길놀이) - 공공누리 제4유형
▲ 거북놀이 (길놀이) - 공공누리 제4유형
이천거북놀이 (터주굿) - 공공누리 제4유형
▲ 이천거북놀이 (터주굿) - 공공누리 제4유형
이천거북놀이 – 공공누리 제2유형
▲ 이천거북놀이 – 공공누리 제2유형

그리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과 같은 제천행사는 월동준비를 마치고 풍작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집단축제로 거듭났다. 그 외에도 윷놀이, 실뜨기, 공기놀이, 자치기, 팽이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썰매타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등이 있었는데 『삼국유사』에서 발견되는 놀이 수만 약 60여 개가 된다. 이상의 놀이들을 보면 삼국과 통일신라의 놀이는 군사훈련, 생산노동, 체력단련과 관련된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내 아동놀이

고분벽화는 일반적으로 많이 훼손되어 있어 가능하다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벽화를 복원하여 홈페이지에 싣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아동놀이에 대한 그림은 아래와 같다.

장천 제1호분 풍속도
▲ 장천 제1호분 풍속도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성백제박물관. 2018. 북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 pp. 268-269 장천1호분 앞방 북벽 풍속도

장천 제1호분 풍속도
고구려 각저총 씨름
▲ 고구려 각저총 씨름
참고문헌
  • 김기정, 권은주. 2018. 『삼국유사』 설화의 유아 인지 놀이 연구. 신라문화 51. pp. 255-272.
  • 김병남. 2021. 한국 고대의 교육적 기초와 지방교육의 흔적. 전북사학 (61). pp. 5-32.
  • 김용길. 2016. 고구려시대의 법률과 효사상에 관한 고찰. 한국의 청소년문화 28. pp. 57-86.
  • 김용길. 2018. 신라시대의 법률과 효사상에 관한 고찰. 청소년과 효문화 31. pp. 39-74.
  • 김정선. 삼국유사 설화의 놀이 유형과 유아 놀이 의미 탐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 박민정. 2006. 신라 교육제도의 전개와 발전. 인제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박향아. 1993. 전통사회의 교육과 놀이로부터 본 어린이 발견. 교육이론과 실천 3. pp. 193-210.
  • 배재훈. 2014. 백제의 태학. 한국고대사탐구 19. pp. 157-207.
  • 송양섭. 2005. 화랑도(花郞徒) 교육에 관한 연구. 인문사회교육연구 8. pp. 75-94
  • 신양재. 1994.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난 아동기 고찰. 대한가정학회지. 32(5). pp. 125-134.
  • 오은순. 2009. 한국전통놀이의 변천사 -유아교육적 적용을 위한-. 실천유아교육 14(2). pp. 51-60.
  • 윤준혁. 2022. 신라 연령등급제의 개편 배경과 운영방식.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이승준. 고구려의 인재양성제도와 한국의 청소년 교육개혁. 청소년시설환경 13(3). pp. 109-131.
  • 이정빈. 2012. 고구려 경당의 설립과 의의. 한국고대사연구 67. pp. 341-371.
  • 이정빈. 2014. 고구려 태학 설립의 배경과 성격. 한국교육사학 36(4). pp. 161-176.
  • 정덕기. 2019. 통일신라 연령등급제의 연령과 속성. 역사학보 (242). pp. 1-42.
  • 정덕기. 2021. 연령등급제의 연령과 속성. 동아시아고대학 (63). pp. 455-494.
  • 한국생활사박물관편찬위원회. 2006. 한국생활사박물관 05 신라생활관. 사계절.
  • 한국역사연구회. 2001.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는 혼란했던 후삼국을 통일하고 474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던 나라였다. 팔만대장경,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의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세계에 ‘코리아’라는 이름을 알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왕조 유지 내내 거란, 여진, 몽골 등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지속적인 외침에도 고려는 불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여 불심을 통한 국난 극복의 자세를 보였고, 일상생활 곳곳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부처를 믿고 따르는 모습이 나타나 우리는 고려를 불교국가라 부른다. 불교국가답게 대장경, 불상, 불화 등 불교 관련 기록들은 다수 남긴 고려이지만 고대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일상을 담은 자료들은 많지 않다. 따라서 고려시대 아동 생활의 이모저모를 상세하게 복원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고려사』와 같은 관찬자료 및 『동국이상국집』(이규보), 『파한집』(이인로) 등과 같은 개인 문집에 소략하게나마 기술되어 있는 아동과 관련한 내용의 조각들을 모아 고려시대 아동의 모습을 재구성해볼 수 있을 뿐이다.
아동관

고려시대 주요 인물들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고려사』 열전이나 고려 문인들의 개인문집을 보면 ‘사람의 소질이나 재주는 태어나면서부터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하늘로부터 부여되는 것이어서 후천적 경험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언급들이 종종 등장한다. 또 아이의 태몽이나 어린시절 아이들의 행동을 통해 그 아이의 미래를 예측하는 내용들도 보인다. 고려시대 대표적 문인 관료였던 이규보가 2세 때 서책을 가지고 놀면서 곧 읽을 듯한 모습을 부모가 보고 그가 문인으로 성장할 것이라 예측했다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고려시대 사람들은 아동의 선천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아동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같은 인식은 고려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불교와도 연관성이 있다. 불교의 윤회설은 고려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현재 처지를 선천적인 업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세계관은 국가에 대한 복종심을 높이고 예정설적 운명관을 갖게 하였으며, 이번 생애에서 자신의 신분을 순응적으로 받아들여 신분제 질서의 동요를 막는 효과도 가져왔다. 이와 함께 고려에서는 영아기를 ‘태고의 순박함이 있는, 꾸밈과 치레가 없는’ 밝고 깨끗한 온전한 상태로 개념화하고 있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타고난 것을 잘 보존하고 계속 유지‧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동이 가지고 있는 좋은 능력이 더 잘 발휘될 수 있도록 아동에게 이해력, 지각력, 문제해결력 등 지적인 측면에서의 교육을 강조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고려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幼(유), 童(동), 兒(아), 孩(해) 등의 표현으로 아동을 지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몇 세까지를 이같은 단어로 인식하고 표기했던 것일까? 고려시대 아동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말해주는 자료는 없지만 성인의 의무인 각종 세금 부과 나이, 과거 응시 가능 나이 등을 통해 본다면 대략적인 짐작은 가능하다. 『고려사』를 보면 ‘병역에 있어 15세 이상의 양반과 백성의 아들 가운데서 보충한다, 15세 미만인 자는 과거 응시 자격을 주지 말라, 한 집에 아들 3명이 있는 경우에는 그 중 1명은 15세가 되면 승려가 될 수 있다, 16세부터 장정으로서 나라의 병역과 부역을 부담한다, 관습에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는 매년 콩 1섬씩을 바치게 했다.’ 등의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고려시대 아동과 성인의 경계가 되는 나이는 15세라 볼 수 있다.

아동과 성인의 경계를 구분지을 수 있는 또 다른 기준 가운데 하나는 혼인 가능 연령이다. 고려시대 혼인 연령을 규제하는 기록은 없지만 『고려사』나 묘지명 등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 사람들은 대체로 15세 이후 혼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13세기 후반 원간섭기가 시작된 이후를 보면 여성들의 혼인 연령이 15세 미만으로 낮아지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왜 이같은 변화가 보이는 것일까?

고려는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원(몽골)과의 긴 전쟁을 치뤄야 했다. 전쟁의 결과는 고려의 참패였고 전쟁에서 패한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과 무리한 요구들을 들어줘야만하는 원간섭기(1259~1356)를 겪게 된다. 당시 원나라의 요구 중에는 원의 궁녀로 일할 고려의 처녀들이 있었다. 이로 인해 총 50여회에 걸쳐 13세 이상 16세 미만 고려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는데 이들을 공녀라 부른다. 그래서 어린 딸을 둔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공녀로 선택될 것을 피하고자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쳐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기도 하고, 13세가 되기 전 10세 무렵부터 빨리 결혼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원의 공녀 요구를 피하기 위해 조혼(早婚) 풍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혼 풍습은 원나라의 간섭이 끝난 후에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교육

불교의 시대였던 고려였지만 국가 통치에 있어서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에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유학 공부가 필수였다. 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과거 시험이 958년 광종년간에 시작되었고 문과(제술과+명경과), 잡과, 승과의 세 분야로 운영되었는데 중심이 되는 것은 문신 관료를 뽑는 문과였다. 따라서 고려시대 교육기관에서는 과거시험을 대비한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이를 바탕으로 글 짓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고려의 과거 시험은 경전에 대한 이해(명경)보다 글을 짓는 제술을 더 중시하였다.

고려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수도인 개경에 국자감‧동서학당(오부학당)‧사학 12도가, 지방에는 향교와 서당이 있었다.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교육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귀족 집안 자제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집이나 서당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고, 이후 향교나 국자감 등의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했다.

고려 건국 후 나라에서 세운 첫 교육기관은 국자감이었다. 신라의 국학을 계승한 것으로 짐작되는 국자감은 태조 왕건 때부터 있었는데 국가 정식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으로 개편된 것은 성종 11년인 992년이었다. 국자감은 내부에 6개의 학교가 있었고 각각은 입학자격에 있어 신분상 제약이 있었다.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손들이, 율학‧산학‧서학은 8품 이하의 자손과 서민들이 입학할 수 있었다. 국자학‧태학‧사문학에서는 유교 경전 및 시무책(時務策)을 주로 가르쳤으며, 기술교육반인 율학‧산학‧서학에서는 각각 법률, 산술, 서예를 가르쳤다.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이었으나 운영을 위한 재정이 고려시대 내내 충분하지 못하여 국자감 교육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특히 무신정권과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국자감은 급속도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다 주자학의 도입으로 충렬왕 때 대성전을 낙성하며 성리학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이 새롭게 발돋움하고 기존의 제술보다 경전에 대한 이해를 중시하는 교육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고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조선이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으며 국자감을 계승한 성균관을 세워 그 기능이 조선으로 이어졌다.

국자감 교육의 부진함을 메워준 것은 고위 관직을 역임했던 관리들이 연 사립학교 사학 12도였다. 사학 12도는 문종 대 문신 최충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개인적으로 자신의 집에 설립한 9재라는 사립학교에서 비롯된 교육기관이다. 9재학당은 최충 사후에도 계속 운영되었고 그 성과가 널리 알려지자 많은 유학자들이 이를 본받아 유사한 학원을 세우며 총 12개 교로 발전하였다. 사학 12도는 권위 있는 유학자들이 세웠다는 점과 국자감과 거의 유사한 교육 내용을 가진다는 점을 기반으로 국자감의 운영이 부진한 틈을 타 크게 흥하며 점차 과거 시험 준비를 하는 예비학교와 같이 되었다. 또한 같은 사학에서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한 동기와 선후배는 이들의 관직생활에 필요한 인맥 형성과 정치 세력화에 매우 유효하게 작용하여 귀족 자제들은 국자감보다 사학 12도를 선호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학에서는 종종 여름철에 절(승방)을 빌려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이를 하과(夏課)라고 한다. 학생들은 무더운 여름 산사나 계곡에서 놀면서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며 공부를 하고 가을이 되면 다시 본래의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갔다. 이같은 여름철 일상에서의 탈출은 학생들에게 휴식의 시간이 되는 것과 동시에 학업 능률을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이 외에도 유학의 진흥을 위해 수도 개경의 동쪽과 서쪽에 동서학당(1390년 공양왕 때 5부학당으로 확장), 지방에는 향교를 두었다. 향교의 경우 고려시대 초반에는 국가의 중요한 지역부터 설치‧운영하였으며, 예종과 인종 때에 설치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향교에는 주로 지방 향리의 자제가 공부를 했고, 충효의 가치관과 장유유서의 질서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다. 개인이 만들어 운영했던 서당도 제도권 교육기관은 아니었으나 고려 전역 곳곳에서 운영되었다. 다만 교육자의 능력이나 교육 목표 수준에 따라 배우러 오는 학생의 수준 및 교육 내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놀이와 활동

고려시대에도 이전 고대국가 때부터 전해진 격구, 말타기, 그네, 활쏘기 등의 놀이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앞선 시기 기록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놀이들도 등장한다. 장기, 척초희, 타구, 풀각시놀이, 호기 등이 그것이다. 척초희(풀던지기 놀이)는 풀뭉치를 공처럼 엮어 던지고 받으며 노는 놀이이고, 타구는 지상에서 공채로 공을 쳐 일정한 거리에 있는 구덩이에 넣는 것으로 현재의 골프와 유사한 놀이이다. 풀각시놀이(草人童女戱)는 여름철에 여러 종류의 풀로 각시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장식하며 노는 여자아이들의 놀이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였기에 불교의 대표적 연례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 때도 아동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연꽃 모양의 등을 밝혀 부처에게 복을 비는 연등회는 고려시대 국가 차원으로 2월에, 민간 차원으로는 4월 초파일에 개최되었는데 연등회를 앞두고 고려의 아이들은 호기(呼旗) 놀이를 즐겼다. 아이들은 연등회를 수십 일 앞두고 종이를 오려 장대에 붙여 깃발을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든 후, 깃발을 앞세우고 북을 두드리면서 마을과 거리를 몰려다니며 연등 비용을 보태달라고 외쳤다. 이렇게 하여 쌀과 베를 얻어다가 연등회 비용으로 사용하였는데 고려의 왕들도 이 놀이를 구경하고 비용을 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매년 가을 추수 뒤 팔관회가 열릴 때면 팔관회의 행렬을 앞에서 이끄는 남자 어린이 ‘선랑’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선랑은 ‘신선 도령’이라는 뜻으로 팔관회 당일 행렬 맨 앞에 서는 어린이를 말한다. 선랑은 매년 팔관회가 개최되기 전 내노라하는 귀족 집안의 10대 남자 아이들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선랑을 뽑는 감독관들은 아이들이 불교에 대한 지식이 뛰어난지, 단정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 선랑이 된다면 어떤 각오로 임할 것인지 등을 들으며 신중하게 선랑을 선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선랑으로 뽑힌 어린이들은 팔관회의 행사 순서와 내용을 꼼꼼하게 익히며 준비를 했고, 행사 당일 아침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머리에 꽃도 꽂고 고급스러운 신발을 신은 뒤 행렬의 맨 앞에서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팔관회가 시작되고 행렬이 출발하면 용, 봉황, 말, 코끼리 모양으로 꾸민 큰 배 모양의 마차 맨 앞 위에 선랑이 섰다. 선랑은 신선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마차 위에 서서 행렬을 이끌었다. 선랑의 마차 뒤로는 악단, 무용수, 광대 등이 따르며 다양한 공연을 사람들에게 보였다.

보호대상아동

고려시대에도 부모가 없어 양육과 보호가 필요한 아동들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제도, 배려 등이 있었다. 『고려사』에 나와 있는 관련 사례들을 보면, 성종 때 보호자 없이 병에 걸린 아동에게 관청에서 곡식을 주어 구제하도록 하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양육할 사람이 없는 자는 10세까지 관청에서 양식을 지급하고, 10세 이상인 자는 원하는 바에 따라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헌종 때도 흉년에 혹한까지 닥치자 관청에서 고아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주어 구제하도록 하였고, 공민왕 때도 관청에 고아 구제를 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가 있다. 공양왕은 과전을 받던 관리가 사망을 하였는데 자녀가 20세 미만으로 부모가 모두 없다면 그 아버지의 과전(科田) 전부를 받아 생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은 국가가 당시 보호대상아동들에 대한 부양의 책임을 일부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같은 일들이 고려시대 얼마나 지속성있게 추진되었으며, 그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 권순형. 1997. 고려시대 혼인제도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국사편찬위원회. 2005.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두산동아.
  • 신양재. 1994. 고려시대 아동양육 연구 –고려사를 중심으로-. 대한가정학회지 32(4). pp. 149-162.
  • 신양재. 1995. 高麗時代 文集에 나타난 兒童養育 考察 (Ⅰ), 가정과 삶의 질 연구 13(1). pp. 134-144.
  • 신양재. 2005.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개인문집에 나타난 아동양육 (1) -아동기 개념화와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대한가정학회지 43(12). pp. 79-96.
  • 신양재. 2006.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개인문집에 나타난 아동양육 (II). 대한가정학회지 44(2). pp. 37-48.
  • 역사교육연구소. 2015. 어린이들의 한국사. 휴먼어린이.

조선 시대는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건국하였고,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 519년 동안 이어졌다. 조선은 고려 말 유입된 성리학을 새로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고, 성리학의 실천 윤리적 측면은 정치, 문화, 외교 등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아동에 대한 인식 및 양육, 교육 과정 속에도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였다. 조선은 1876년 개항 이후 일본 및 서구 열강과 근대 교역을 시작하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되어 이 글에서는 조선 건국부터 개항 이전까지의 아동 역사를 살펴보았다.

아동관

성리학에서는 아동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았으며 성현의 삶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동을 장차 가정과 사회를 이끌어 갈 존재로 인식하고 교육의 가능성이 큰 긍정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다. 또한 아동은 가정과 사회의 규범을 지켜야 하며 아동 개인보다는 개인이 속한 가문을 위해 입신양명해야 하는 존재였다. 성리학은 성별, 연령, 신분에 따른 역할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아동은 부모, 스승, 연장자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였기 때문에 남아는 가문의 대를 잇고 지역, 국가 등 가정 밖의 사회에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고, 여아는 제사 등 가정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조선 후기에 나타났던 유교의 새로운 학풍이자 사상이었던 실학은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실제 생활과 실용성을 중시하였고, 이는 아동에 대한 인식과 교육에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성리학과 실학 모두 아동을 본성이 선하며 무한한 교육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생각했다는 점과 유교의 장유유서의 위계질서 속에서 개별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가문의 구성원으로서 보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한 면이 있다. 그러나 실학은 교육 측면에 있어서 아동의 흥미와 발달단계 등 아동의 특수성을 인지하고, 아동 개인의 능력과 재주에 따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성리학의 아동관과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일부 실학자들은 기존의 초등 교재들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다소 관념적이며 교육의 주체인 아동을 고려하기보다 성리학적 가치만을 주입하는 교육 방식이었다고 보고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따라 19세기 당시 발간된 초등 교재들은 아동에 대한 이해와 존중 의식이 엿보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배제하고 실제 현실 생활에 적용 가능한 내용을 싣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정약용의 『아학편』은 『천자문』의 암기 형식과 달리 아동의 인지발달 과정을 염두에 두고 집필하였고, 장혼의 『아희원람』은 아동의 흥미를 고려하여 백과사전 형식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국속(國俗), 지리, 인물, 역사 등을 수록하였다. 또 다른 일부 실학자들은 신분제라는 제약을 경험하면서 아동을 성인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의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능력과 재주에 따라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학의 움직임과 함께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을 통해 천주교가 전래되고 1861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 전파되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의식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갔고, 이에 따라 양반뿐 아니라 평민의 아동도 존중해야 함을 주장하는 소리가 생겨났다. 나아가 천주교와 동학의 평등 사상을 통해 아동을 점차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고 아동의 삶에 대한 존중이 더욱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아동기는 이전 시대와 동일하게 대체로 15~16세 이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적합하다고 본 혼인 연령은 여자는 14~20세, 남자는 16~30세로, 이에 따라 조선은 성인식인 관례(冠禮)를 여자는 15세에, 남자는 15~20세 안에 치루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여자는 14세, 남자는 15세가 되면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호적법에서도 노(老), 장(壯), 약(弱)을 기재하였는데, 노는 60세 이상, 장은 16~59세, 약은 1~15세를 가리켰고, 16세가 된 장정은 지금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역할을 하는 호패를 착용하였으며, 부역(賦役)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통해 조선 시대 아동기는 15~16세 이전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교육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서당)
▲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서당) 출처: 문화재청

조선은 유교 이념에 근거한 사회체제를 형성하기 위해 교육체제를 정비하였다. 태조는 국가 교육 기관으로 한양에 성균관과 4부 학당(四學)을 세우고, 지방 각 군현에는 향교를 건립했다. 그리고 개인이 세운 사립교육기관으로 서당과 서원이 있었다. 이와 같은 교육기관들은 교육 대상에 따라 초등 교육기관인 서당, 중등 교육기관으로 4부 학당과 향교, 서원, 그리고 고등 교육기관인 성균관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당시 핵심적 교육기관을 좀 더 살펴보면, 초등 사립 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은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 함께 발전하였고 17세기에 지방 양반이 성장하면서 그 숫자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가 되면 그 수가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보통 4~5개 마을마다 서당이 있다”라고 기록했을 정도가 되었다. 당시 글방, 서재, 책방, 사숙, 학방으로 불렸던 서당은 양반 자녀뿐만 아니라 평민 자녀들까지 가르쳤고, 간혹 여성을 위한 서당이 가숙(家塾)형태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서당 학생은 보통 7~8세부터 15~16세의 아동들로서 하루 일과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공부가 시작되기 전에 훈장에게 인사를 드린 뒤 훈장으로부터 옛날 이야기, 훈계, 예의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상식이나 예절을 배우고, 전날 배운 것을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시험에 통과해야만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많은 경우에는 훈장 한 사람이 학생들을 일일이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나이가 많고 우수한 학생이 보조 교사처럼 학생들을 가르쳤다. 서당에서는 책 한권을 끝낼 때마다 ‘책거리’를 하였는데, 부모님들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떡을 해 보내면 훈장님과 학생들이 모여 함께 나누어 먹었다. 졸업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학생들이 정해진 책들을 다 배우면 자연스럽게 그만두는 방식이었다.

나주 향교 대성전
▲ 나주 향교 대성전 출처: 문화재청

고려 시대의 5부학당이 한양의 5부 중 동부, 서부, 남부, 중부 4곳에 세워졌고, 건물, 기숙사 제도 및 재정 기반이 마련되면서 4부학당으로 재정비되었다. 4부학당은 서당에서 기초적인 유학 공부를 마친 사람을 입학시켜 성균관에 진학시키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입학시험은 따로 없었고, 양인 이상의 신분으로 8세가 되면 입학을 허가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15세 전후의 연령층이 가장 많이 재학하고 있었으며, 간혹 20세 이상의 청년들도 공부하였다.

조선은 국가의 정치이념인 유교가 전국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중앙의 4부학당을 운영하는 것과 함께 각 지방마다 향교를 세워 토비와 노비를 지급하고 책과 교사를 보내는 등 향교 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조선 초기 각 지역의 향교는 대체로 8~10세의 어린 학생들도 향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보통 16세 이상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었고, 때로는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해서 마을의 부녀자나 어린이를 교육하기도 하였다. 4부학당과 향교 학생 중 성적이 좋은 경우 과거시험 중 소과의 초시를 건너띄거나 대과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군역을 피하고자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학생으로 등록하는 폐단도 생겨났다.

그리고 일부 가문에서는 여아 및 여성들을 교육하기 위한 『여훈서』들을 직접 발간하기도 하였고, 음식 조리법에 관한 책들도 나타났는데 딸들이 필사하여 조리법이 전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육내용을 보면 조선시대 여아들은 집 안에서 주로 부녀 4행(婦女四行)인 덕성, 말씨, 맵씨, 솜씨 등 결혼 이후 아내, 며느리, 어머니로서 필요한 지식과 예절, 그리고 살림에 필요한 내용들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던 중소 지주 출신의 사림(士林)들이 세운 사립 교육기관이었고, 설립에서 운영까지 사림들의 자율에 맡겨져 교육의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덕분에 국립교육기관들이 과거시험 준비를 목표로 삼은 것과는 달리 학문탐구와 인격완성에 집중하는 교육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향교에 비해 까다로운 규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수한 교수진과 교육 내용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서원은 학생 자격에 있어 특별한 제한 없이 실력과 행실을 중요시하였고 중등교육에서부터 고등교육 수준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입학하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다. 그 결과 지방에서는 점차 향교보다 서원의 수가 많아지고 위상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사액서원이 될 경우 토지와 서적, 노비 등을 하사받았고, 면세 및 면역의 특권을 부여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양반 자제들이 주로 서원에 입학하고, 평민 자제들은 향교에 들어가는 것이 점차 관례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서원이 난립하면서 이를 규제하는 정책이 강화되었고, 흥선 대원군 때에는 왕권의 권위를 높이고 민폐를 줄이는 한편 궁핍한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고자 600여 개의 서원이 철폐되고 47개소의 서원만 남게 되었다.

조선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은 고려 시대에도 있었다. 고려의 국자감이 고려 후기 공민왕 때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것이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은 성균관을 설립하면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과 교육을 통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과거 시험 중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야 했다. 하지만 생원과 진사만으로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한 경우 추가로 4부학당의 학생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 시험에 통과한 사람,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의 정실 아들로서 『소학』 시험에 통과한 사람, 또는 조정의 관원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 등이 입학할 수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주로 유교 경전을 공부하면서 관리가 되기 위해 ‘대과’라는 과거 시험 준비를 하였는데, 학비와 기숙사비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조선의 아동들은 유교와 관련된 책으로 공부를 하였는데, 아동들은 6세경부터 『천자문』이나 『유합』을 읽으며 기본 한자를 익히고, 다음 단계로 『명심보감』, 『동몽선습』, 『격몽요결』과 같은 윤리 교훈서를 읽었다. 그 다음 『소학』을 배우고, 『소학』 이후에는 『효경』 및 사서삼경 등을 읽었다. 그 중에서 『소학』이 매우 중요한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학』은 유교 교육의 입문서로서, 유교 사회의 도덕 규범 내지 윤리 강령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선별하여 묶은 책이다. 향교 및 4부 학당에서도 『소학』은 필수 과목이었고, 4부 학생 중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승보시에서도 『소학』으로 시험을 보았다.

한편 유교 교육 외에 잡학(雜學)이라 불렸던 기술교육은 해당 기술 관청에서 직접 교육을 담당하였다. 주로 중인 집안의 아동들이 역과(통역), 의과(의학), 음양과(천문학), 율과(법률) 등을 배웠는데, 기술학을 배우는 학생은 10~15세 사이의 아동들이 많았다. 과거시험 잡과 합격자의 연령이 대체로 16-20세가 가장 많았는데, 이는 기술학의 경우 대체로 조기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여자 아동들은 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여자 아동들을 위한 교육이 부재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는 유교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열녀 및 효부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제시하면서 이 규범을 가르치기 위해 여성 전용교재를 간행하여 보급하였고, 한문을 모르는 일반인과 여성을 위해서는 그림과 한글로 설명해놓은 『언해삼강행실열녀도』나 『소학언해』와 같은 교재를 만들었다. 양반의 경우 여자 아동을 위해 집에 가정교사를 두거나 부모들이 직접 교육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문건의 육아일기 『양아록』을 보면 손녀가 9세가 되었을 때 육십갑자(六十甲子)로 숫자를 가르치고 이후 『천자문』, 『소학』, 『오륜행실도』, 『삼강행실열녀도』을 가르쳤다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출처: 문화재청
양아록
▲ 양아록 출처: 문화재청
보호대상아동

우리나라는 천재지변이 발생했을 때 부모 잃은 고아를 구제하여 왔는데, 조선 시대에는 고아를 연령에 따라 3세 이하의 유아는 ‘유기아’로, 4세부터 10세까지의 아동은 ‘행걸아’로 지칭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였고, 이는 법령에 기록되어 있다.

1470년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 혜휼조(惠恤條)에는 진휼청, 한성부의 5부 혹은 지방 관아 등에서 유기아 · 행걸아를 관리하는 법적 기준을 갖추고 민가에서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기아들을 수양하거나 노비로 삼아 이들의 생명을 우선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과 대기근으로 유기아 및 행걸아가 대량으로 발생하여 『경국대전』에 의해서만 구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국가는 필요할 때마다 임시특별법 형태로 이들을 구제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들이 민가 노비로 삼는 방편으로 이용되거나, 민가 수양을 빙자한 인신매매와 유괴 등의 폐단이 많아지자 숙종은 「을해진휼사목」을 제정하여 노비가 되기 전 유예기간을 갖도록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1782년~1783년 대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자식을 버리는 사례가 많아져 떠돌며 구걸하는 아동 수가 급증하게 되자 정조 1783년에 총 9개조의 「자휼전칙」이 제정·반포되면서, 임시특별법 형태로 존재하였던 유기아 구제가 정식으로 법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유기아나 행걸아가 발견되면 진휼청 관리나 지방 관리가 부모나 친척이 있는지 찾은 뒤, 연고자가 없을 경우 민간에서 수양할 사람을 찾았으며, 여의치 않으면 진휼청에서 보호하며 양육하였다. 진휼청에서 유기아와 행걸아를 양육하는 경우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연령에 따라 달리 분배하였다. 유기아의 경우 기아 2인당 한 명의 젖어미를 배정하였고, 젖어미에게도 양식과 의복을 제공하였다. 10세 이상된 행걸아는 진휼청 밖에 움집을 마련해 주었고 흉년에만 보릿고개 이후까지 식량을 지급하였다. 조선시대의 「자휼전칙」은 우리나라 전근대 시대의 대표적인 아동복지 법령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고아들을 노비로 만드는 폐단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연재해 등 빈곤으로 기아 및 고아가 된 아동들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보호 시스템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휼전칙
▲ 자휼전칙 출처: 디지털 장서각
진휼청 (충청수영진휼청 배면전경, 문화재자료 제412호)
▲ 진휼청 (충청수영진휼청 배면전경, 문화재자료 제412호) 출처: 문화재청
참고문헌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 (성균관, 향교, 서당)
  • 김찬웅. 2008.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글항아리.
  • 김춘식. 2011. 조선시대 서원 정책. 한국행정학회 학술발표논문집. pp. 1-18.
  • 공계순 외. 2013. 아동복지론. 학지사.
  • 곽효문. 2001. 조선조 자휼전칙의 복지행정사적 의의. 행정논총 39(3). pp. 53-70.
  • 류점숙. 1989. 조선시대의 인간 발달단계 및 그 교육내용. 아동학회지 10(2). pp. 1-18.
  • 박향아. 1993. 전통사회의 교육과 놀이로부터 본 어린이 발견. 교육이론과 실천 제3권. pp. 193-210.
  • 백혜리, 이은화. 1997. 조선시대의 성리학, 실학, 동학의 아동관 연구. 아동과 권리 1(1). pp. 47-63.
  • 변주승. 조선후기 유기아·행걸아 대책과 그 효과-급량책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3·4). pp. 366-401.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서울 2천년사 17권 조선시대 서울의 교육과 학문
  • 선우미정. 2017. 조선시대 유교의 자녀교육론-태교와 아동교육을 중심으로. 양명학 (47). pp. 251-287.
  • 손인수. 1979. 동학사상의 아동관. 교육사교육철학 3. pp. 37-41.
  • 역사교육연구소. 2015. 어린이들의 한국사. 휴먼어린이. pp.136-147.
  • 유안진. 1990. 한국전통사회의 유아교육. 서울대학교 출판부.
  • 이방현·이방원. 2018. 한국사회복지역사. 신정.
  • 장연화. 2000. 한국 아동복지 변천과정에 관한 사적 고찰. 강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장재천. 2009. 서당의 교육과 풍속 및 놀이. 한국사상과 문화 제48집. pp313-344
  • 조남욱. 2007. 조선시대 청소년 교육에 관한 연구. 유교사상문화연구 30. pp. 203-240.
  • 조경원. 1995.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분석. 여성학논집 12. pp. 39-62.
  • 정재걸. 2001. 전통 사회의 놀이와 교육. 동양사회사상 4. pp. 233-253.
  • 채휘균. 2002. 조선시대 초기 서원의 설립 배경과 성격. 교육철학 20. pp. 173-187.
  • 최종찬. 2013. 19세기 초학교재에 나타난 아동교육관의 특징.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최홍기. 1997. 한국호적제도사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개화기는 일본에 의해서 불평등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게 된 1876년부터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합이 있기 전까지의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이때부터 성리학을 중심으로 유지해왔던 조선 사회의 체제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개화기의 조선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패권국인 청나라와 신흥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에 새롭게 등장한 서구열강과의 접촉을 통해 서양문물을 새롭게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새로운 문물이 유입이 되면서 전통과 서구 문물이 혼재된 시대적 특성을 지닌다. 이때 전통 유학자 및 개화파 지식인이 각각 새로운 국면에 처한 국가의 안전과 발전을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지만, 이들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일반 한국인 지식인들에 의해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고, 서양 선교사가 교육과 의료기관을 설립하며 선교활동을 해나갔다. 이처럼 생각과 목적이 서로 다른 다양한 주체들이 활동하였던 개화기의 조선에서는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같은 국내·외의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였고, 점점 나라의 앞날은 불안정해졌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 체결되고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된 후 식민지로 변모하는 아픔을 겪는 시기가 이어졌으며, 결국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아동관
잡지 『소년』 표지
▲ 잡지 『소년』 표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제1유형)

개화기 아동에 대한 인식에는 유교의 사상적 영향과 더불어 동학과 기독교 사상의 전파, 서양식 제도의 도입, 그리고 신문 및 잡지와 같은 새로운 대중매체의 유통 등이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아동은 개항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흐름 속에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중요한 존재로 점차 자리 잡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500년 가까이 조선 사회를 이끌어 온 성리학이 있다. 성리학에서 가정은 국가의 최소단위로 규정되었는데, 아동은 가정의 후사를 책임질 어른이 되어가는 존재로 인식하였고, 아동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덕성을 겸비한 성인군자로 성장할 수 있는 인성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개화기 이전에 충효사상의 함양과 올바른 군자로 성장하기를 강조하였던 성리학적 교육을 받았던 아동은 개화기부터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부강하고 독립된 자주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의 주체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최남선이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잡지인 『소년』을 창간하면서 ‘소년’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소년’은 기존의 세대에 대응하는 신세대의 국민이자 민족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는데, 개화기의 ‘소년’은 현재적 관점의 유소년과 청년을 구분하기보다는 이 둘을 함께 통칭하는 개념으로 시대적 상황과 요구가 반영된 명칭이었다. 즉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자주독립의 문명국가를 건설할 새로운 주체에 대한 절박한 요구가 새로운 세대로서의 ‘소년’을 등장시켰고, 여기에 ‘계몽’에 대한 강한 의지가 반영되었다.

이처럼 전통과 새로운 사상의 복합적인 영향을 받은 당시 아동관은 아동의 위치가 점점 사회를 이끌어갈 주역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중심부로 이동해가는 전환기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교육

1876년 개항 이후 개화파 지식인들은 열강의 각축 속에서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존의 교육방식을 새롭게 바꿔야한다고 느꼈고, 김기수를 시작으로 박영효, 유길준 등은 일본과 유럽 및 미국을 방문하여 살핀 외국의 교육상황을 고종에게 소개하고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개화파의 주장은 정부로 하여금 전문 통역관을 양성하는 외국어학교인 ‘동문학’(1883년)과 유력 양반가 자제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학, 지리 등을 가르치기 위한 육영공원(1886년)을 설립하도록 이끌었다. 유학자들 역시 교육개편방안을 고심하였는데, 이들은 조선의 전통에 기반하여 인륜을 배우고 주체성을 겸비한 후 새롭게 변화하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인재양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1886년 고종은 사회운영의 근본원리가 유교사상에 기반하여 의리를 실천하는 것임을 다시 천명하였고, 정부는 유학경전을 연구하는 경학을 중심으로 경학원 체제를 전국적으로 수립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887년 서울 성균관 내에 경학원을 설립하고 이어서 지방에도 설립하였다. 결국, 1880년대 개화파와 유학자들 사이의 견해는 개혁의 기준으로 전통적인 지식과 새로운 지식 중 무엇을 더 비중 있게 교육시키는가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 이들 모두 나름의 방식에 따라 교육제도를 바꾸는 데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던 교육 개조의 방안은 개화파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갑오개혁(1894년 7월~1896년 2월)을 통해 결국 서양의 지식을 익히는 데 큰 비중을 둔 교육체제로 재편되어 갔다.

갑오개혁기 정부는 1895년 1월 「홍범 14조」를 발표하면서 신분의 구애 없이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인재로 등용하고, 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오도록 해야 함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은 1895년 2월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고, 조선의 부국강병과 국가의 존립을 도모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이 바로 나라의 백성을 교육시키는 것이며, 그 교육내용은 실용적인 신교육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1895년 9월 정부는 「소학교령」을 공포하여 8세부터 15세까지의 아동을 대상으로 현재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공립 소학교(小學校) 설립과 함께 초등교육을 가르치는 교원양성기관인 사범학교를 설립 운영하겠다고 하였다.

교육개혁에 대한 일련의 공식적인 발표 이후, 정부는 초등학교기관인 소학교와 교사양성을 위한 사범학교를 설치하고 학교의 관제와 규칙을 빠르게 제정하면서 교육기관의 중심이 전통적인 서원이나 성균관이 아닌 소학교와 사범학교 등의 새로운 체제로 전환시켰다. 소학교의 편제는 3년제의 심상과와 2, 3년제의 고등과로 나누어 수업연한은 총 5~6년이었다. 소학교의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심상과의 기본 교과목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수신(修身), 글씨 쓰기를 익히는 습자(習字), 독서, 작문, 산술 및 체조였고, 고등과의 기본 교과목은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본국지리, 본국역사, 외국지리, 외국역사, 이과, 도화 및 체조 등으로, 전통교육과 신교육을 함께 가르쳤다.

정부에서는 앞으로 대학교나 전문학교도 설립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현실적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이자 교육기관의 중심이었던 성균관을 무시하고 대학을 신설하기도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대신에 정부는 1880년대 유학교육을 주된 내용으로 개편하였던 경학원체제와는 달리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여 본래 유학을 공부하는 명맥을 유지하는 가운데 경학과 소속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 중심의 교육에 역사학, 지리학, 수학 등의 서구의 지식을 배우는 과목들을 추가하여 이 둘을 함께 교육시키는 형태로 개혁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학문을 심도있게 배우기 위한 고등교육은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는데, 실제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유학을 가는 국가는 주로 일본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민간의 영역에서도 남녀를 불문하고 활발한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초기 개항장이었던 함경남도 원산의 민간인들은 1883년에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원산학사를 세워 아동에게 유교경전과 함께 산수, 농잠, 광채(礦採: 광물 캐기)와 같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교육시킴으로써 부국강병에 기여할 인재로 키워 외세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 원산에 사는 사람들이 학교설립에 크게 호응한 이유는 이들이 개항장에 살면서 새로운 문물을 빨리 접할 수 있었고 신지식을 배워야한다는 시대적 필요성에 민감하게 공감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1898년 서울 북촌 양반집 부인들 중심으로 조직된 찬양회(讚揚會)는 「여학교설시통문(통칭: 여권통문)」을 선언하고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의 획득을 위한 한국 최초의 여권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일환으로 새로운 방식의 교육기관인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를 설립하고 여성들에게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근대 신문 매체를 통해 여성이 애국적 2세 국민을 교육하는 어머니로서의 위치와 여성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하였다.

한편, 서양 선교사들은 기독교 포교 차원에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아펜젤러(Appenzeller)의 배재학당(1885년), 언더우드(Underwood)의 경신학교(1886년), 스크랜튼 대부인(Scranton)의 이화학당(1886년), 앨러스(Ellers)의 정동여학당(1887년)이 대표적인 학교였다. 기독교계 학교는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학생들에게 기독교적 평등사상을 가르치고 서구의 지식을 보다 빠르게 전파하였으며 학기와 시간배정에 따른 새로운 학제의 설립 등을 통해 개화기에 이루어진 교육개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들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을 하는 주류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의 교육정책에 일본의 간섭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학부(學部: 현재의 교육부)의 참여관으로 온 일본인 관리가 일본 정부에 제출한 「한국교육개량안」(1905년 4월)에 의해서이다. 이 개량안에는 장래 한국이 제국의 보호국으로서 여러 가지 시설을 개량할 때 필요한 교육을 실시할 것, 일본어를 보급할 것, 학제과정을 손쉽게 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통감부는 개량안에 따라 1906년 「보통학교령」을 공포한 뒤,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심상과와 고등과를 통합하였으며 수업연한을 5~6년에서 4년으로 단축하였고 학교를 쉽게 장악하기 위해 일본인 교원을 교감으로 두게 하였다. 그리고 학부에서는 1905년을 전후해서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지 않았다. 이에 대응하여 애국단체에서 다수의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고 간행하여 사립학교의 교재로 사용하였지만 한국의 교육정책이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놀이와 활동

개화기의 아동은 연날리기, 그네, 쥐불놀이, 팽이돌리기, 제기차기, 소꿉놀이과 같은 전통적인 놀이와 함께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새롭게 소개된 야구와 축구, 체조 등의 놀이를 모두 향유하였다. 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회라고 할 수 있는 ‘화류회(花柳會)’이다. 화류회는 1896년 5월 2일 서울 동소문 앞 삼선평에서 영국인 교사 허치슨(Hutchison)과 핼리팩스(Hallfacx)의 지도 아래 관립외국어학교 분교인 영어학교 학생들이 소풍과 운동을 겸한 야외놀이 행사였다. 원래 ‘화류’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세시풍속의 하나로 봄과 가을에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 이웃 마을 서당에 다니는 아동들끼리 장치기, 줄다리기, 릴레이식 바가지 밟기 등과 같은 신체단련놀이의 형식을 띤 대결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한 화류는 개화기 때 ‘화류회’로 명칭이 바뀌고 집단체조, 300보, 600보 달리기, 공던지기, 대포알던지기, 멀리뛰기, 높이뛰기 등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탈바꿈하였다. 영어학교의 화류회가 끝나고 약 20여 일이 지난 1898년 5월 31일 화류회는 ‘운동회’라는 명칭으로 변모하였는데, 조선시대 때 무술시험과 무술훈련을 담당했던 관청인 ‘훈련원’에서 처음으로 운동회라는 이름의 ‘관립소학교 연합운동회’가 열렸고, 이때 아동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의식이 운동회 활동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리고 운동회는 점차 신식학교와 지역 청년회를 중심으로 단순한 체육활동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조선의 국권 회복을 상징하는 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고, 초기 근대체육을 일반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보호대상아동

한국에 현대의 고아원과 같은 전문보호아동시설은 1854년 프랑스인 신부 메스트르(Maistre)가 고아구제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조선 영해회(嬰孩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개항 이후 한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이 체결되면서 국내로 유입된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지의 선교사들이 고아원을 설립하면서 고아들을 위한 육아와 구호사업이 활발해졌다. 개화기 때 보호대상 아동에 대한 구호활동의 특징은 이들에게 단순히 의복과 음식,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는 일시적인 구호활동보다는 고아원이라는 시설을 설립한 뒤 이들을 가르치고 아플 때 치료해주는 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개화기 당시 대표적인 고아원은 1894년 샬트르 수녀회에 의해 설립되어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인천 천주교 부속의 해성보육원과 한국인이 설립한 경성고아원이었다. 경성고아원은 1906년 이필화에 의해서 설립되었는데, 이필화는 그의 아들 이우선과 함께 대한제국(1897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명이 변경됨) 황실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호응과 지지를 받으면서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이처럼 경성고아원이 각계각층의 응원을 받았던 이유는 당시 애국을 위한 시대적 요청과 보호아동구호의 중요성을 느낀 사회 전반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여성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Hall)은 1894년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만난 시각장애를 가진 여자 아이 오봉래에게 점자교육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서구식 특수교육의 장을 열었고, 이후 1897년에 한국 최초의 장애인 학교라 할 수 있는 ‘맹학교(盲學校)’를 평양에 세웠다. 물론 장애인을 위한 구호활동과 직업활동은 이전 시기부터 부분적으로 존재하였지만, 개화기 때 체계적으로 새롭게 나타난 특징은 특수학교를 설립하여 보호대상아동에게 점자사용법을 가르치고 점자교과서를 만들어 성경, 지리, 음악, 산수와 함께 편물, 마사지와 같은 실용기술과목을 교육시켰고, 이러한 서구식 특수교육이 직업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 해성보육원에서 수녀들과 고아원 아동들 출처: 해성보육원 홈페이지
참고문헌
  • 독립신문. 황성신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구희진. 2004. 한국 근대개혁기의 교육론과 교육개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김성학. 2009. 근대 학교운동회의 탄생: 화류에서 훈련과 경쟁으로. 한국교육사학 31(1). pp. 57-94.
  • 김수경. 2009. 최남선의 ‘소년’과 방정환의 ‘어린이’ 사이의 거리. 한국문화연구 16. pp. 49-80.
  • 김은정. 1998. 한국 개화기의 유아교육사상에 관한 연구. 관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박영기. 2009. 한국 근대 아동문학 교육사. 한국문화사.
  • 박용옥. 1984.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연구. 한국정신문화원.
  • 박정란, 서홍란 공저. 2002. 아동복지론. 양서원.
  • 박환. 2014. 근대 수원지역 학교운동회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 pp. 5-42.
  • 백혜리. 1997. 조선시대 성리학. 실학. 동학의 아동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백혜리. 2003. 외국인의 기록을 통해 본 개화기 한국 아동의 삶. 아동권리연구 7(3). pp. 1-25.
  • 백혜리. 2006. 해방전 한국인의 아동관 변천: 1876-1945. 열린유아교육연구 11(2). pp. 391-417.
  • 소래섭. 2002. 『少年』誌에 나타난 ‘소년’의 의미와 ‘아동’의 발견. 한국학보 28(4). 일지사. pp. 103-126.
  • 신용하. 1974.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 설립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10. pp. 191-204.
  • 오오타케 키요미(大竹聖美). 2005. 근대 한·일 아동문화와 문학 관계사(1895-1945). 청운.
  • E. 와그너 지음. 신복룡 역주. 1999. 한국의 아동생활. 집문당.
  • 원종찬. 2008. 한국 아동문학의 형성과정 연구: 『소년』(1908)에서 『어린이』(1923)까지. 동북아 문화연구 1(15). pp. 73-97.
  • 유방란. 1994. 한국근대교육의 등장과 발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윤정란.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역사적 기원지 - '여권통문' 결의 장소 발굴 -. 여성과 역사 30. pp. 33-78.
  • 위영. 2014. 익숙하고 낯선 이야기 운동회(運動會). 기록인 2014 AUTUMN 28. pp. 72-80.
  • 이방원. 2012. 개화기 고아구제 연구. 이화사학연구 (45). pp. 169-202.
  • 이방현, 이방원 공저. 2018. 한국사회복지역사. 신정.
  • 이소희 외 공저. 2002. 영유아복지론. 양서원.
  • 이승원. 2005. 학교의 탄생: 100년 전 학교의 풍경으로 본 근대의 일상. 휴머니스트.
  • 이인영. 2015. 한국 근대 아동잡지의 ‘어린이’ 이미지 연구 - 『어린이』와 『소년』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장덕삼. 1994. 한서(翰西)의 아동교육사상 연구. 원광교육연구 13. pp. 1-26.
  • 조연순, 정규영. 2003. 아동관과 초등교육 목적의 변천: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2003년도 한국초등교육학회 연차학술대회. pp. 37-70.
  • 주수길. 2002. 아동복지강의. 양서원.
  • 최경숙. 1998. 개화기의 여성교육론. 외대논총 18(2). pp. 31-54.
  • 최한수. 1997. 한국 유아교육 사상의 고찰. 미래유아교육학회지 4(1). pp. 39-72.
  • 한규무, 노기욱. 2010. 대한제국기 경성고아원의 설립과 운영. 서울과 역사 (76). pp. 163-210.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에 의해 주권이 침탈당했던 시기이다. 일제는 당시 일본 본토의 정세와 세계 경제 상황의 변동에 따라 1910년대는 무단통치로, 1920년대는 문화통치로, 1930년대부터 해방에 이르는 시기는 병참기기화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였다. 일제는 문명국인 일본이 미개 야만 상태의 조선인을 문명·근대화로 이끈다는 명분으로 한국인의 모든 일상을 지배하면서 인적 물적자원을 수탈하였다. 한편 조국의 독립을 소망하는 한국인은 이 시기 동안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벌리며 독립과 해방 이후를 준비했으며, 기독교 각 종파의 선교사들은 1940년을 전후하여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강제 추방될 때까지 뜻있는 한국인들과 함께 교육, 의료,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아동관

일제강점기 아동관은 크게 일제에 의해 주도된 아동관과 한국 지식인에 의해 주도된 아동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제의 아동관은 조선총독부가 4차례 걸쳐 반포한 「조선교육령」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교육령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교육방침과 세부 조항으로 이루어진 법령으로, 조선교육령에서 규정된 교육 목표가 곧 식민지 조선 아동에 대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에게 조선의 아동은 문명국 일본의 교육을 받게 하여 일본 천황과 일본제국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양순한 국민으로 키워내야 할 존재였다. 일제 후기 병참기지화 시기에는 충량한 황국신민의 자질에 더하여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신념 아래 전쟁과 근로에 필요한 신체를 만들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였다.

한편 한국인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아동은 한국 미래의 희망으로 이들에게 올바른 양육과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국력을 키우고 자주독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이러한 자각하에 ‘어린이’라는 용어가 탄생하였다. ‘어린이’라는 용어는 1920년 8월, 방정환이 『개벽』 제3호에 번역하여 기고한 ‘어린이 노래’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애녀석’, ‘어린애’, ‘아해놈’과 같이 아동을 낮추어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늙은이’, ‘젊은이’처럼 존대하는 호칭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방정환은 아동의 ‘어림’을 미성숙 또는 계몽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크게 자라날 어림’, ‘새로운 큰 것을 지어낼 어림’이라고 정의하였다. 나아가 아동을 나라의 미래, 희망으로서의 아동, 가정에서의 사랑받는 존재인 아동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 ① 아동은 성인과는 다른 독자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 ② 아동은 내적 성장력을 가지고 있다, ③ 교육의 목적은 아동의 성장과 발달 자체여야 한다, ④ 교육의 방법은 흥미와 기쁨과 활동의 원리를 우선해야 한다, ⑤ 교육의 내용은 아동의 지성 · 감정 · 의지의 성장과 발달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⑥ 교사나 기성세대의 임무는 아동의 자유로운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다 등의 생각이 시작되고 확대되었다.

유아에 대한 서구 양육 및 교육관이 식민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유아 교육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유치원과 함께 유아교육자를 양성하기 위한 이화학당 유치원사범과(1915), 중앙유치사범과(1922) 등의 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는 아동의 성장 시기별 양육에 있어서의 유의점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태아기에는 태교의 중요성을, 영아기에는 건강에 유의하며 위생 및 청결과 관련된 양육 방법을 강조하였다. 유아기에는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유아교육과 유치원 교육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 유아 교육의 구체적인 방법과 내용들이 소개되었고. 학령기에는 지식 교육과 함께 덕성, 좋은 습관을 키우는 것도 강조되었다.

나아가 당시 언론에서는 아동을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고 교육받을 권리, 학대받지 않을 권리, 권리 주체로서의 아동, 참여 주체로서의 아동에 대한 기사를 실어 아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 확대, 심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아동관의 변화 하에서 일반 한국인 사이에서도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아동들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성장해야 하며 신분,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아동에게 평등하게 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교육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영구적인 지배를 위해 조선의 아동 교육에 주의를 기울였고, 일제강점기 동안 총 4차례에 걸친 「조선교육령」의 제개정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제정하면서 한국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함으로써 한국인을 ‘충량한 국민’으로 육성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정하고, 교육방침을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이라고 밝혔다. 제1차 조선교육령의 핵심은 문화와 민도가 낙후되어 있는 식민지 조선의 아동에게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고 저급한 수준의 보통교육을 실시하여 근로와 직업에 충성스러운 하급의 식민지 근대인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의 실과(實科)수업
▲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의 실과(實科)수업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공공누리 제1유형)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조선인의 각급 학교는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등으로 규정하여, 일본인의 각급 학교인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와 이원화된 교육체계를 형성시켰다. 또한 조선인의 학제는 보통학교 4년제, 고등보통학교 4년제로 규정되었으나, 일본인은 소학교 6년제, 중학교 5년제로 규정하여 차별적인 교육을 받게 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식민지 통치 방침을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일제의 내지연장주의 및 동화주의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의 학제 및 수업연한을 일본과 동일하게 실시하도록 규정하였고, 이에 따라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였다. 동화주의 교육을 내세우며 조선의 교육을 일본과 동일한 수준으로 높여 놓은 것처럼 보이나,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는 일본 아동이 다니는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으로 민족 차별과 민족 간 분열을 의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일제는 전시체제에 부합하는 교육정책을 펴기 위해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제정하였다. 제3차 조선교육령은 교육을 통해 조선의 아동을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전환시켜 전쟁 수행에 인적, 물적자원으로 동원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제3차 조선교육령의 실시로 보통학교는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고등여학교로 각급 학교의 명칭을 변경하여 일본인의 각급 학교 명칭과 같게 하였다. 그러나 그 실제 목적은 조선인의 교육을 일제가 장악하고 더욱 철저하게 한국인을 황국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이었다. 1941년 3월 31일 일제는 교육령의 일부를 개정하여 「국민학교규정」을 공포하였고 종래 소학교의 명칭을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1941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에서 전쟁물자를 조달하고 전쟁에 학생들을 동원하기 위하여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제4차 조선교육령은 이제까지 선택과목으로 존재하던 조선어를 교과과정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일본어, 일본도덕, 일본지리 등 교과를 ‘국민과’라는 종합 교과로 통일시켜 중요하게 교육하였다. 전쟁 말기인 1945년 5월 「전시교육령」이 공포되면서 학생들의 교육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중등학교 이상의 각 학교에는 학교 교련과 군사훈련이 시행되었다. 일제 말기 학생들은 학병으로 전쟁에 끌려 나갔으며, 남아 있는 학생들은 남녀 또는 초중등 구별 없이 각종 전쟁물자 증산을 위한 노력 제공, 방공호 파기, 군사훈련 등에 동원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 민족 말살과 황국신민화를 위한 교육제도 속에서도 민간인들은 각종 사립학교와 서당, 야학, 사설 강습소 등의 다양한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일제 주도의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여 한글 교육을 통한 문맹퇴치, 생활에 필요한 기초교육과 민족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으며,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인정한 교과서만 사용하도록 강요당하고, 설립과 운영에 관한 각종 규제로 인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또한 개신교가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 역시 탄압으로 수난을 겪으면서도, 교육을 통해 민족을 일깨우며 선교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기독교를 더욱 압박하였고, 숭실학교, 수피아여학교, 정신여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 일부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

놀이와 활동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황국신민화라는 목표 아래 행해진 민족 차별적, 비교육적 교육환경 속에서 한국인 지식인 사이에 아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21년 천도교 내에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되었고, 그 1주년이 되는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였다. 1923년 3월 천도교소년회 잡지로 『어린이』를 창간하였고, 1923년 4월 소년문제를 연구하자는 취지로 ‘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였으며, 소년운동협회 주최로 1923년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하는 등 일련의 아동 사업을 진행하였다. 제1회 어린이날 행사에서 발표한 ‘소년운동의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라.
  • 3)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한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 1928년 조선소년총연맹이 주최로 어린이날 포스터
출처: 매일신보. 1928.05.05. 어린이날의 선전포스타.

이 선언은 1924년 국제연맹이 ‘제네바 선언’으로 발표한 ‘아동권리선언’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어린이날이 되면 전국 각 지방의 소년운동단체들이 주도하여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가극공연, 강연회, 동화 · 동요회 등을,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어머니대회와 아버지대회 등을 개최하여 어린이에 대한 인식 전환 및 어린이 권리 증진에 대한 실천을 홍보하였다.

어린이들은 ‘어린이날’ 표어가 적힌 깃발을 들고 행진하였으며,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어린이들 스스로 자신이 미래의 희망, 귀중한 존재임을 인정받는 경험을 하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어린이날 행사가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어린이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어린이날을 주도했던 전국 소년운동단체가 1935년에는 200여 개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23년부터 어린이날이 전국 단위로 확산되고 조선인의 집회와 가두행진 등의 행사가 실시되자 이를 위험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어린이날 행사를 사전 검열하였고, 때에 따라 준비된 행사를 허가하지 않아 취소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28년부터 5월 5일을 아동애호일로 정하고 조선사회사업협회가 주관하여 아동의 건강을 위한 계몽 강연 및 우량아 선발대회, 아동과 임산부 무료건강상담, 보육원 원아들의 운동회 및 원족회 등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조선사회사업협회 주관의 유유아애호주간이 널리 실시되고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전시체제가 되면서, 한국인 주도의 ‘어린이날’ 행사는 축소되었고 결국 1938년 이후 어린이날 공식행사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이날 어린이들의 기행렬
▲ 어린이날 어린이들의 기행렬
출처: 매일신보. 1932.05.02. 어린이날의 기행렬.
경성부교육회가 주관한 아동애호데이 포스터
▲ 경성부교육회가 주관한 아동애호데이 포스터
출처: 매일신보. 1928.05.06. 아동애호 포스타.
어린이날을 맞아 경성 장충단에서 진행된 경성육아사업단체의 연합운동회
▲ 어린이날을 맞아 경성 장충단에서 진행된 경성육아사업단체의 연합운동회
출처: 매일신보. 1931.05.10. 고아들의 즐거운 날.
보호대상아동

일제강점기 보호 대상으로 주목받고 개인과 단체로부터 보호받았던 아동은 크게 고아, 부랑아, 장애아였다. 조선총독부는 개화기에 한국인 이필화가 설립한 경성고아원을 인수한 뒤 1911년 ‘제생원양육부’를 설립하여 고아를 수용, 양육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개화기에 설립된 고아양육시설 외에 한국인이 계룡풍덕원(1913), 호제풍덕원(1914), 구례홍제원(1918), 일본인이 겸창보육원(1913), 평양불교광제회(1917), 선교사가 구세군육아홈(1919) 등의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아들에 대한 보호가 국가나 친족 혹은 마을공동체 차원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아동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고아구제를 하나의 공공 의무로 생각하면서 한국인이 설립한 경성보육원(1920), 평양고아원(1921), 일본인이 설립한 목포공생원(1927), 조선고아수양원(1930), 평전육애회(1930) 등의 고아원이 각 지방에서 고아를 사회인으로 성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1920년대의 고아는 연민의 대상인 동시에 절도나 범죄를 저지르는 ‘부랑아’ 또는 ‘불량아’로도 인식되었다. 일제는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부랑아와 불량아에 대한 대응책으로 범죄를 저지른 불량소년을 처벌하기 위해 개성소년형무소(1923), 김천소년형무소(1923), 인천소년형무소(1936)를 설치하였다. 또한 범죄 예방 및 교화를 위해 1923년 「조선감화원령」을 공포하고, “연령 8세 이상 18세 미만의 자로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으며 적당한 친권을 행할 자가 없는 자”들을 원산 영흥학원(1923), 목포 목포학원(1938), 인천 선감학원(1941)에 수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장애아를 위한 기관도 설립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제생원 맹아(盲啞)부를 서울에 설립하였으며, 평양에는 1894년 로제타 홀이 설립한 미북감리교의 맹아학교가 확장 운영되고 있었으며, 1935년에는 미북장로회도 ‘평양맹아학교’를 설립하였다.

상의 고아원, 감화원, 맹아시설 등의 아동보호기관에서는 수용 아동의 연령과 특성에 따라 필요한 양육과 교육을 제공하였고, 그 교육은 기초학력뿐 아니라 직업교육도 병행하여 아동들이 미래에 자활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경성고아원은 양주에 농장을 설치하여 나이가 많은 고아들에게 농업기술을 가르쳤으며, 맹아시설에서는 시각장애아에게 점자교육, 안마술과 침술교육을, 청각장애아에게 목공과 양재 등의 기술을 가르쳤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동보호시설이 각 분야별로 양적인 증가를 보였으나, 해당 시기 도움을 필요로 했던 아동들의 욕구를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참고문헌
  • 매일신보. 조선일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나래. 2016. 근대 아동권리에 대한 의미 고찰: 1920년대부터 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어린이교육비평 6(2). pp. 5-26.
  • 김정의. 1992. 한국소년운동사. 민족문화사.
  • 김혜경. 2006. 식민지하 근대가족의 형성과 젠더. 창비.
  • 백혜리. 2006. 해방전 한국인의 아동관 변천: 1876-1945. 열린유아교육연구 11(2). pp. 391-417.
  • 소현숙. 2007. 경계에 선 고아들. 사회와 역사 73. pp. 107-141.
  • 안경식. 1999. 소파 방정환의 아동교육운동과 사상. 학지사.
  • 안주영. 2020. 일제강점기 체화된 황국신민의례와 일제의 ‘착한 근대 아동’ 만들기: 경성의 소학교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 53(3). pp. 231-304.
  • 양문식. 1973. 개화기 이후 가정과 교육의 사적 고찰, 1900-1945를 중심으로. 대한가정학회지 11(1). pp. 92-106.
  • 이방현, 이방원. 2018. 한국사회복지역사. 신정.
  • 이병담. 2007. 한국 근대 아동의 탄생. 제이앤씨.
  • 조연순 · 정규영. 2003. 초등교육의 역사적 탐색: 아동관과 초등교육 목적의 변천. 한국초등교육학회 학술발표논문집. pp. 37-70.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이내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고 결국 1948년 남쪽과 북쪽에 각각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1950년 같은 민족끼리 총구를 겨누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는 국가재건을 위한 여러 노력들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국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경제개발의 성과를 이루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독재와 반독재, 군사정권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현대 한국 사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한 변화의 가운데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 비준은 한국에서 아동을 보호의 대상에서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주체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 한국 아동의 인식과 지위, 그리고 삶의 모습은 1991년을 전후로 큰 차이를 보인다.

아동관

해방 후 대한보이스카우트 중앙연합회(현 한국스카우트연맹), 대한소녀단(현 한국걸스카우트연맹) 등의 소년운동단체가 발족되며 소년운동이 다시 기지개를 폈다. 1937년을 마지막으로 일제가 강제로 중단했던 어린이날도 1946년 5월 5일 기념식을 가지며 재개되었다.

이때 현재의 어린이날 노래도 만들어졌고 어린이날도 5월 5일로 확정되었다. 1957년에는 총 9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만들어져 그해 어린이날 기념행사에서 공포되었다.

「어린이헌장」을 통해 당시 사회는 아동을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존재로 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국가와 사회는 아동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건강한 양육과 보호, 안전과 교육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야 함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이헌장」 선포를 계기로 그간 사회운동 차원에서 민간에서 추진해왔던 어린이날 행사가 국가 차원의 공식행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1975년에는 5월 5일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1981년 전면 개정된 「아동복지법」에 어린이날이 법률로 직접 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60년대 들어 아동과 청년의 중간 시기 개념으로 ‘청소년’이 등장하였다. 국가는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아동에게 부여한 공식적 과제는 학업이었고 이를 위해 학생의 신분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다보니 점차 학업에 좀 더 매진해야 하는 중고등학생 연령을 특정하는 호명이 필요해지면서 ‘청소년’이란 용어가 생겨난 것이다. 이후 국가는 이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 1965년부터 『청소년 백서』를 발간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15개 민간단체들이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를 창설하였다. 나아가 1987년에는 아동에서 청소년을 분리하여 「청소년육성법」(대상연령 9세 이상 24세 이하)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에는 체육부에 청소년국을 설치하였다. 1990년에는 국제사회에 일었던 청소년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논의를 받아들여 「청소년헌장」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청소년헌장」은 청소년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며 미래사회를 이끌어 나갈 존재로서 바라보고 청소년의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정, 학교, 국가 및 사회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현이 강제되지 않았기에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아직은 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진 수동적인 대상이었을 뿐 그들의 권리가 온전히 존중받고 주체성이 인정받는 단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학생의 신분으로 학업을 수행해야만 했던 타율적 존재였던 것에서 점차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향해 나아가는 자율적 존재로 그리고 공동체의 성원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의 변화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까지 아동이 「어린이헌장」과 다양한 법과 제도로 보호를 받는 존재가 되었지만 동시에 성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여전히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게 된 배경에는 1953년 9월에 제정되었던 「민법」의 아동관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민법」에 기존에 없던 ‘미성년’의 개념이 정의됨으로써 아동은 인권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갖게 된다. 「민법」은 만 20세 미만의 남녀를 부모의 보호를 받는 미성년으로 정의하여 이들은 독자적으로 법률행위를 할 수 없고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있을 때만 법률행위가 가능한 존재로 규정하였다(단, 2022년 현재 미성년은 2013년 개정된 민법에 따라 만 19세 미만이다). 이는 미성년자가 법률행위를 할 때 잘못된 판단과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채무 등을 부담한 채 성인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긍정적인 보호 장치 역할을 하였다. 반면 아동은 스스로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을 판단할 수 없는 존재로 위치 지어지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민법」 가운데 아동과 관련해 주목할 또 다른 요소는 가족질서를 규정하는 호주제였다. 당시 남성‧장자 중심의 호주제는 자녀의 신상에 관한 최종 결정권을 아버지에게만 부여하면서 동시에 자녀에 대한 징계권도 주었다. 이러한 결정은 이후 오랜 세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의 법적 뿌리로 작용하여 학대받는 아동 구제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러한 폐단 때문에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민법」 개정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고, 1977년 개정된 「민법」은 가족 내에서 어머니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1990년 가족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부부가 동등하게 아동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호주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아동의 의견을 무시한 채 오로지 가부장의 의견만 따라야 했던 과거와는 달라지는 변화를 보였다.

교육

1945년 11월 발족한 조선교육심의회는 모든 아동을 단일 조직의 학교 아래에서 초‧중‧고‧대학교 교육을 6년-3년-3년-4년으로 교육하는 단선형 학제를 채택하였다. 이후 「제헌헌법」(1948년) 16조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 모든 교육기관은 국가의 감독을 받으며 교육제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규정하였고 이듬해 제정된 「교육법」을 통해서도 초등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아동의 의무교육 실시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의무교육은 제대로 시작도 못한 채 연기되었다.

실질적인 초등의무교육은 휴전 후 수립된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으로 실행되었는데, 이 계획을 위해 문교부는 교육 예산의 약 80%를 의무교육에 편성하면서 1954년부터 6년간 총 학령아동 취학률은 96%까지 올라갔다. 그렇지만 한 교실에 70~8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 수업을 받는 열악한 환경은 쉽사리 개선되지 못하였고 여전히 일부 빈곤한 가정의 아동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노동에 참여해야 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이 우선적으로 교육에서 소외되었으며, 산간벽지와 같이 학교가 없는 지역 아동들도 제도권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해 실질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는 못하였다.

해방 이후 구체적인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과 내용 및 새로운 교과서 편찬은 1946년 2월 미군정청이 조직한 ‘교수요목제정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해방된 직후였기 때문에 홍익인간 정신에 입각한 애국 애족의 교육을 강조함과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제거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 수립 후 「교육법」이 제정됨에 따라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기존의 교과를 기본으로 하여 1954년 4월 발표되었다. 1차 교육과정(1954.4~1963.1)은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현실생활을 개선‧향상시킬 의지를 갖도록 교육함과 동시에 반공과 실업교육을 강조하였으며 특별활동시간을 최초로 배정했다. 이후 2차 교육과정(1963.2~1973.1)은 각 지역사회의 자원을 지역 실정에 따라 학생의 학습경험에 활용하는 것을 지향하였고, 3차 교육과정(1973.2~1981.2)은 기술인력의 양성, 학문중심 교육으로의 접근을 추구하였다. 4차 교육과정(1981.2~1987.6)에서는 중학교 의무교육의 단계적 추진, 예체능을 제외한 과외 전면금지조치, 과학·외국어·예체능 분야의 조기 영재교육을 위한 특수목적고 신설 등이 추진되었다. 5차 교육과정(1987.7~1992.9)은 민주화의 시류에 발맞춰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늘어나고 반공교육이 순화되었으며 교육과정에 있어 내실화를 꾀하였다.

장애아동을 위한 학교 교육 지원은 1977년 「특수교육진흥법」 제정으로 법제화되었고 이후 한국 특수교육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이 법의 제정으로 장애아동도 학교 교육이 포용할 수 있게 되어 전국에 공립 특수학교와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이 본격적으로 신설 및 증설되기 시작했다. 또 이들에 대한 교육은 무상으로 하도록 명시되었는데 이는 초등학교 무상의무교육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한편 1979년 ‘세계 아동의 해’를 계기로 유아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었고,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유아교육 강화 방침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전두환 정부는 이듬해 유아교육체계의 정비와 시설 확충을 위한 「유아교육진흥법」을 제정한 뒤, 유아교육 인구의 양적 확대를 목표로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투자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유치원, 새마을유아원, 어린이집 및 농번기유아원 등으로 다원화되었던 유아교육체계가 유치원과 새마을유아원(현 어린이집)으로 조정‧통합되었고, 유아교육은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갔다. 1983년에는 유치원 관련 최초의 독립행정 기구인 유아교육담당관실을 문교부 보통교육국 산하에 신설하여 모든 유아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 및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보호대상아동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미군정과 정부 수립, 한국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과 같은 굵직한 현대사를 겪었던 45년간의 세월 동안 의지할 곳 없는 아동들은 생존을 건 사투의 시간을 보냈다. 특히 한국전쟁 중 아동들은 목숨을 잃거나 목숨의 위협을 받았고, ‘소년병’이라는 이름으로 전투에 참여해 폭력에 직접 노출되었다. 피난 중 부모를 잃어버리거나 부모가 모두 사망해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매우 많았으며, 때로는 극심한 가난과 혼란으로 부모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기아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시기 피난민촌 아이들(1952.5.7.)
▲ 한국전쟁 시기 피난민촌 아이들(1952.5.7.) 출처: 근현대사아카이브 (공공누리 제2유형)

이들은 거리를 배회하며 구걸할 수밖에 없었고, 길거리에서 껌이나 담배 등을 팔고 구두닦이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때로는 불량아동이 되어 금품 강요, 소매치기, 절도 등을 하며 생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아’는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 하는 아동 중에서도 가장 긴급히 살펴봐야 하는 ‘요보호아동’이 되었는데, 최근까지 이들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노력은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고아원(아동양육시설)사업

해방 후 사회가 안정되기 전에 전쟁까지 치룬 한국정부는 전쟁복구에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던 탓에 전쟁고아, 부랑아 등을 위한 생활구호사업과 사회복지사업의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웠고, 부족한 재원은 유엔아동기금(UNICEF), 미국대외원조물자협회(CARE), 기독교아동복리회(CCF, 현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한국선명회(현재 월드비전), 세이브더칠드런 등의 해외원조단체들이 충당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 1980년까지 고아, 기아와 같은 보호대상아동들은 민간과 해외원조단체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수용보호되어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거나 국내․외 가정으로 ‘입양’이 되었으며 혹은 ‘가정위탁’이라 하여 일정기간 국내의 위탁가정에 맡겨져 보호를 받았다.

해외원조단체들은 고아원의 운영비와 밀가루, 쌀, 옷, 도서 등의 물품을 기증하거나, 고아원을 직접 설치․운영하면서 고아들을 육성하였다.

공생보육원 구호금전달식
▲ 공생보육원 구호금전달식 출처: e영상역사관 (공공누리 제4유형)

덕분에 1949년 101개 고아원에 7,338명의 아동이 생활하였던 것이 1952년 8월에는 280개 고아원에 3만 473명의 아동들이 수용․보호될 수 있었고, 1955년에는 시설 수가 480개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54년 겨울, 약 14만여 명 되는 고아, 부랑아들을 보호하기에는 시설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고, 재정상의 문제로 시설 수를 늘리는 것도 곤란했다. 또한 국가와 민간단체는 점차 고아들을 시설중심으로 보호하는 것의 문제와 한계점을 인식하게 되면서 많은 재정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고아들을 보호․양육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고, 그 방법은 현재 ‘가정보호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입양’과 ‘가정위탁’이었다.

입양사업

입양은 1950년 이전까지 「민법」 또는 관습법에 의해 국내단위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한 외국 군인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출생한 다문화 아동이 많아지면서 그 양상이 변화하였다. 당시 한국 사회는 단일민족 중심의 사고방식이 만연하던 때여서 다문화 아동들은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었고, 이들은 학부모들의 반대로 일반 학교에 취학하기도 어려웠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이들을 제대로 양육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외 입양이 거론되었다.

처음 다문화 아동이 국외로 입양된 것은 1953년이었지만 본격화된 것은 미국에서 「해외혼혈아이민법」(1955년)이 통과되고 해리, 홀트(Harry Holt)라는 한 미국 농부가 8명의 다문화 아동을 입양한 것에서 출발한다.

1955년 미국으로 입양을 간 8명의 한국전쟁 고아
▲ 1955년 미국으로 입양을 간 8명의 한국전쟁 고아 출처:국가기록원 (저작권은 국가기록원과 협의)

1956년 2월 홀트 부부는 한국에 ‘홀트씨해외양자회’를 설립한 뒤 다문화 아동 중심으로 국외 입양을 주선하였는데 1959년 이후에는 전쟁고아나 기아 등의 한국 아동 입양도 진행하였다. 이후 1970년대에 국외 입양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1953년부터 1969년까지 9,066명에 지나지 않던 것이 1970년대 4만 8,247명으로, 1980년대에는 6만 5,329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985년에는 한 해 동안 사상 최고인 8,837명의 아동이 입양되었다. 그 결과 1953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 프랑스, 스웨덴 등 15개국에 입양된 아동은 16만 6,512명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비공식적으로 입양된 경우까지 고려하면 실제 국외 입양아동은 약 2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는 국외 입양에 대한 비난과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없애고자 「고아입양특례법」(1961년)과 「입양특례법」(1976년) 제정, 불우아동건전육성대책 마련(1976년), 국외 입양에 대한 쿼터제 적용 등을 통해 보호시설에 있는 아동의 국내입양을 유도하고 국외 입양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국내의 여전한 혈연중심문화와 인식 부족으로 번번히 실패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아동의 인구수가 감소한 이유뿐 아니라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1996년)에 따라 보호대상아동의 원가정 보호와 국가의 입양절차 전반에 대한 관리감독 의무를 강화하고 국내입양우선제도 및 국외 입양 감소를 위한 강제할당제를 마련하는 등의 방안을 마련한 결과, 2014년 국외 입양아동의 수는 535명으로 감소하였다.

가정위탁사업

가정위탁사업은 고아들을 사회의 명망 있는 인사 등의 가정에 일시적으로 위탁하여 건전한 인격발달을 도모하고 만족스러운 사회적응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었다. 정부는 1963년 가정위탁사업을 대행할 기관으로 전국 규모의 대한양연회를 설립하였고, 아동복지리도원을 채용하였다. 그리고 아동복리지도원은 자녀 없는 가정을 조사하고 시․군의 부녀지도원과 함께 시설아동들을 입양 혹은 위탁양육을 연계하였으며, 정부는 위탁가정에게 한 달에 500원에서 1,000원에 해당하는 보육비와 양곡을 지급하였다. 이때 위탁에는 고용위탁의 유형도 있었는데, 고용위탁이란 16세 이상의 아동의 경우 직장을 알선하고 이들을 고용한 각 직장의 책임자가 후견을 맡아 보호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단체 생활에 익숙하던 아동들이 가정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위탁을 받은 가정에서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위탁아동에게 집안 일을 시키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정부는 가정위탁사업에 대한 경험과 인프라를 갖추고 있던 한국복지재단(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위탁사업과 관련하여 협조를 요청하는 동시에 정부차원에서도 1985년 5월부터 인천과 광주에서 가정위탁시범사업을 진행하였으나 보다 본격적인 행보는 2003년 「유엔아동권리협약」 이행에 관한 권고를 받은 후이다. 정부는 2003년 전국에 17개의 가정위탁지원센터를, 2004년 7월 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를 설치하였고, 2005년 7월에는 「아동복지법」을 개정하여 가정위탁지원센터의 설치 및 운영에 대한 근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2015년 말 현재 전국 1만 1,066세대에서 1만 1,332명의 아동을 가정위탁으로 보호하고 있다.

연장아동사업

이 외에도 정부가 고심한 고아 관련 사업은 아동복지시설에서 퇴소하거나 위탁보호가 종료된 아동들에 대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연장아동, 즉 시설에 입소한 아동이 18세 이후에도 퇴소하지 못하고 입소 기간을 연장하여 시설에 남아있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1950년대부터 있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에서는 연장아동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대통령 유시(諭示)가 내려지고, 보건사회부는 후생시설에 18세 이상의 연장아동에 대한 퇴소를 지시하였다. 그리고 「중앙소년직업훈련소직제」(1957년)를 제정하고 민간 직업보도시설에서 연장아동들이 합숙을 하면서 목공, 이발, 프린트, 재봉 등의 기술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아동복리법(1961년)에 소년직업보도시설을 포함하였다. 이후 정부는 불우아동건전육성대책(1976년) 중 하나로 연장아동의 직업보도 강화를 포함하였지만,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본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3년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사업을 펼치기 위해 퇴소연장아동을 위한 자립지원센터를 전국에 8개소 설치하였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센터에서는 보호대상아동에게 안정적으로 사회에 진출하여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취업지도, 직업교육, 사회생활에 대한 상담 등의 ‘자립지원’ 서비스까지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자립지원서비스는 아동양육시설 퇴소아동만이 아니라 가정위탁보호,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의 아동까지 그 대상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참고문헌
  • 공계순. 2013. 아동복지론. 학지사.
  • 김흥수 등. 2017. 서울사회복지사 제3권 현대 복지서비스. 서울역사편찬원.
  • 김흥수. 2003. WCC도서관소장 한국교회사자료집-한국전쟁편. 한구기독교역사연구소.
  • 남찬섭 등. 2017. 서울사회복지사 제2권 현대 복지정책과 제도. 서울역사편찬원.
  • 보건복지부. 각년도. 보건복지백서.
  • 보건복지부. 각년도. 보건복지통계연보.
  • 아동권리보장원 편. 2022. 대한민국아동권리100년사, 아동권리보장원.
  • 조성은. 2021. 보건복지 분야 국가민간 역할문담의 역사적 전개와 과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 함종규. 2003. 한국교육과정 변천사 연구. 교육과학사.

19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았다.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경제 민주화를 향해 나아갔으며, 특히 세계 최빈국의 오명을 씻고 1996년 12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으로 가입할 정도로 국력이 신장하였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실업자가 대량 발생하고 가정이 해체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전 국민이 합심하여 빠르게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6년에는 GDP 1조 달러를 돌파하고 1인당 GDP는 2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같은 경제의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는 국가 수준에 맞는 권리와 복지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동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아동에 대한 인식과 관련 법규 제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유엔아동권리협약이다. 아동권리협약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권 관련 국제협약 중 하나로 특히 전 세계 아동의 권리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권리규범이다. 유엔은 1989년 아동권리협약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이듬해 9월 2일 발효했다. 한국도 1990년 9월 25일 이 협약에 서명하고 이듬해 11월 비준하였다. 이로써 한국도 국제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협약의 당사국이자 아동권리협약 이행 의무국이 되었다. 협약에 서명한 나라는 아동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와 이행의 진정 상황을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이에 한국은 2022년까지 총 6차에 걸친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그에 대한 유엔의 심의 결과를 받아 아동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1994년 11월 1차 보고서를, 2000년 5월 2차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유엔은 보고서를 심의한 후 권고사항을 전달하였다.

유엔의 권고에 따라 한국은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고용 최저 연령을 만 15세 미만으로 바꾸고,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해 가정폭력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고자 하였으며 아동학대신고, 아동보호전문기관 신설, 긴급전화 설치 등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아동의 권리를 지지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적 조치가 이루어지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2009년 5월 3차‧4차 국가보고서가 다시 유엔에 제출되어 심의가 이루어졌다. 앞선 두 차례의 심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협약의 이념을 반영한 실질적인 아동 관련 법 제도 개선에 진전이 이루어졌다. 2007년 「민법」 개정으로 혼인 가능 연령이 남자 만18세, 여자 만16세에서 남녀 모두 만18세로 조정되었고, 부모에게만 인정되던 면접교섭권을 자녀도 부모를 만나기 원할 때에 면접교섭권을 신청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아동복지법」에서 ‘인종차별 금지’를 명문화하였으며, 아동권리모니터링센터 설치 및 아동인권전문위원회 운영 등이 이루어졌다. 특히 국내 최초로 아동권리협약 이행을 위한 NPO연대가 2005년 9월 창립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아동권리의 당사자인 아동들도 협약의 이행과 관련한 부분의 보고서 작성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아동들은 아동 관련 이슈에 대해 직접 또래 친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나 심층 인터뷰를 한 결과 그리고 권리교육프로그램 참여 경험을 보고서에 담았으며, 여러 문제들에 대한 스스로의 해결 방안까지도 제시하였다. 이는 권리의 주체자인 아동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이를 신장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17년 12월 5차‧6차 국가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이 보고서 제출 때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와 4건의 아동보고서, 국내외 NGO 단체의 24개 보고서가 함께 제출되었다. 특히 아동보고서는 이전과 달리 권리 주체인 아동들이 직접 보고서를 작성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유엔은 이전보다 시민사회와 아동의 참여가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냈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은 아동권리 증진에 더욱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2011년 「입양특례법」을 개정해 국내외 입양 시 모두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입양의 적절성을 공식적으로 검토하는 절차를 마련하였다. 2013년에는 영유아에 대한 전면 무상보육서비스를 실시하여 아동의 보편적 복지 실천의 모습을 보였다. 이 밖에도 사회의 다원화로 인해 점차 증가하는 한부모가족과 다문화가족, 난민아동, 학교 밖 청소년 등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아동들에 대한 생활 환경 전반에 대한 지원과 모든 폭력으로부터의 금지를 위한 근거 규범을 보완하였다. 이처럼 5‧6차 보고서는 아동권리협약의 여러 영역들에 대한 정책과 한계에 대한 분석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발의하여 아동권리 증진과 발전에 한걸음 더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유엔아동권리협약 비준 및 이행과 더불어 2000년대 아동과 아동권리에 대한 인식 변화에 큰 전환점이 된 계기는 호주제 폐지이다.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호주제는 아동을 독립적인 인격체를 가진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부모의 소유물이자 부모, 특히 가장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 법적 근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국적법」에서 그 변화가 시작된다. 기존에는 아버지가 한국민일 경우 그 자녀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했으나 법 개정 후에는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한국 국적이라면 그 자녀에게 국적을 부여하였다. 이로써 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2003년 5월 호주제 폐지를 내용으로 한 민법개정안이 발의된 것을 시작으로 오랜 노력 끝에 2005년 3월 「민법」이 개정되면서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호주제의 폐지로 이제 가족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결정되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로써 자녀는 아버지에게 종속된 가문의 구성원이 아니라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 성과 이름은 가문의 구성원이란 징표가 아닌 아동 본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으며, 출생신고 이후라도 필요한 경우 변경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가문의 연속성의 유지보다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변화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같은 호주제의 폐지로 아동의 신분관계와 가족관계는 모두 아동 자신을 기준으로 결정되며, 부모의 역할은 아동의 복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1960년대 아동과 청년 사이의 개념으로 등장한 청소년과 관련하여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청소년=학생’이라는 생각을 바꾸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었다. 청소년들 중에는 학교 밖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1991년 「청소년육성법」이 「청소년기본법」(대상연령 9세 이상 24세 이하)으로 개정되었으며, 1992년 청소년정책기본계획이 수립되었다. 1997년 제정된 「청소년보호법」(대상연령 19세 미만)과 이 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청소년은 보호가 필요한 대상임을 알리고 이들을 흡연 및 음주, 성매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데 역할을 하였다.

교육

1992년 6차 교육과정(1992.10~1996.12)은 다가오는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대비하는 21세기 미래상’을 목표로 삼으며, 교육에서 처음으로 창의성과 도덕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대학입학시험이 1994년 기존 학력고사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뀌었고,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초등학교로 변화(1996)된 교육과정이다. 7차 교육과정(1997.1~2009.2)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를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으로 설정하고 이후 2년간의 선택중심 교육기간에 학생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심화선택과목을 배울 수 있게 하였다. 7차 교육과정 이후부터는 교육과정을 더 이상 전면적·일률적으로 개편하지 않고 수시로 부분적인 개정을 하고 있다.

한편, 7차 교육과정이 운영 중이던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계층 간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교육 평등 및 교육 기회의 균등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정부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기회의 지역 간 격차 해소를 위해 2003년부터 저소득층 밀집지역을 교육복지투자 우선 지역으로 지정해 해당 지역의 교육‧문화‧복지환경 개선을 위한 대책 마련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사업은 2011년 교육복지 우선 지원사업으로 이름이 바뀐 후 방과 후 취약계층 학생들의 맞춤형 통합교육복지지원사업인 교육복지 안전망 구축사업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조기 발굴하고 학생 각자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적 역량강화 정책 지원도 이루어졌다. 특히 현재 교육현장에서는 개인의 자질 향상과 역량 개발, 특화된 인재 육성 등이 강조되면서 학생들이 교육의 대상자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육 과정과 학습 설계의 전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주체로 변신하도록 요구하였다. 따라서 역량 중심 학교교육은 학습자가 교육과정에서의 모든 선택 및 결정에서 발휘되는 지식, 가치, 태도를 습득하여 모든 결정을 주도, 설계,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아동권리의 성장기라 부르는 오늘날 교육의 선택권은 물론 교육의 주도권까지 아동에게 넘어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장애아동 교육분야에서도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1994년 「특수교육진흥법」의 전면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통합교육 및 개별화교육 등 새로운 교육사조가 도입되었고, 특수교육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장애학생의 적절한 선정·배치 등 절차적 권리 강화하는 등의 획기적인 조치가 포함되었다. 이후에도 「특수교육진흥법」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계속해서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법 자체가 초중등교육 중심으로 규정되어 있다 보니 장애 영유아나 장애 성인을 위한 교육지원에 대한 규정이 미흡했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특수교육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역할의 제시가 부족하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이에 2007년 다시 한번 기존 법을 폐지하고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이 법은 특수교육대상자의 의무교육 연한을 유치원 과정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확대하고, 만 3세 미만의 영아와 고등학교 이후의 전공과 과정을 무상으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또 만 3세 미만의 장애영아에 대한 무상교육과 함께 장애의 조기 발견을 위한 무상의 선별검사 실시, 또는 영유아건강검진 결과를 활용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장애영아의 장애교정과 경감, 2차 장애 예방 및 발달 촉진, 장애자녀를 둔 가정의 가계 부담 경감, 사회적 비용 최소화 및 사회통합 촉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보호대상아동

1990년 이전의 국가와 사회는 고아, 기아 등 요보호아동 중심으로 아동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한정적으로 수행했다면, 1990년 이후에는 한국의 모든 아동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준수하는 방향으로 책임과 역할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그 배경에는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관심과 보호를 기울여야 할 아동집단이 광범위해졌던 사회적 상황과 1990년대 말 IMF 위기를 겪었던 경제적 상황 그리고 1991년 이후 「아동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가입국으로써 유엔의 권고사항을 이행해야만 하는 대외적 상황들이 있다. 결과 한국은 유엔의 권고사항에 따라 기존의 고아, 기아 등 긴급구호가 필요한 요보호아동뿐만 아니라 저소득층과 빈곤 가정의 자녀, 학대와 방임을 받는 아동, 비행청소년, 다문화가정의 자녀 등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동에까지 관심을 놓치지 않고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권리증진과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탁아사업

탁아사업은 한국 정부가 저소득층 혹은 빈곤 가정의 아동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표사업 중 하나이다. 공보육의 효시가 되는 탁아시설 설치는 「아동복리법」(1961년)에서 시작되었고, 그 대상은 취업 여성의 아동과 영세민 극빈 가정의 6세 이하의 아동이었다.

이후 교육과 보육의 기능을 통합하는 「유아교육진흥법」(1982년) 제정을 거쳐 「영유아보육법」(1991년)이 제정된 뒤, 정부는 6세 미만의 취학 전 아동인 영유아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보호․양육하는 동시에 영유아의 발달 특성에 적합한 교육을 제공하는 시설 확충을 중점사업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보육 시설의 장으로 하여금 저소득층 자녀, 다문화 가족 자녀 등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동을 우선적으로 입소시키도록 하였으며, 이에 대한 비용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전부 또는 일부를 부담하고 있다.

정부는 탁아사업 이외에도 「모자복지법」(1989년)을 제정하여 모자가정에 생계보호, 교육보호, 생업자금융자, 주택제공 등을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보호자가 자립자활의 역량을 키워 자신의 자녀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아동의 빈곤예방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2011년)을 제정하여 기초수급자 가정, 한부모가족, 다문화가족의 아동 등 경제적으로 취약할 수 있는 가정에서 생활하는 18세 미만의 아동을 위한 사업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2004년 「아동복지법」을 개정하여 방과 후 돌봄이 필요한 지역사회 아동의 건전한 육성을 도모하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운영해오던 기존의 공부방을 아동복지이용시설로 법제화하였다.

소년소녀가정 사업

정부는 가정해체 등으로 증가한 소년소녀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선가정 후시설 보호‘라는 정책을 세우고, 1985년부터 소년소녀가정을 생활보호 대상자로 책정하여 생계, 의료보호, 교육보호를 제공하면서 피복비 및 영양급식 그리고 학용품비 등을 지원해오고 있다. 그러나 소년소녀가정은 시설보호나 가정위탁에 비해 좀 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아동보호 형태이기 때문에, 1999년 이후부터는 15세 미만의 소년소녀가정의 경우 가정위탁이나 시설에 입소하는 것을 유도하고 있다. 단, 시설입소의 경우 1995년부터 보호아동이 가정과 같은 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소규모의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6년 12월 그룹홈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되면서 1997년부터 3년간 10개의 그룹홈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하였으며, 2004년 1월에는 아동복지시설의 한 유형으로 포함하였다. 그리고 2002년 32개소였던 그룹홈이 2015년 480개소로 증가하였고, 2,636명의 아동이 보호받고 있다.

아동학대사업

한국의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1980년 전후부터 시작되면서, 한국사회복지협의회의 ‘아동학대고발센터’(1979년), 서울시립아동상담소의 ‘아동권익보호신고소’(1985년), 아동학대예방협회 발족(1989년)의 ‘아동학대신고센터’, 한국어린이재단과 굿네이버스의 아동학대신고센터 등의 기관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신고건수가 저조하였고,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기관이 신고접수를 받아도 사건을 처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IMF 경제위기로 인한 가정불화로 아동학대가 증가하고, 학대아동에 대한 끔찍한 실태가 1999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되면서 사회의 아동학대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아동학대에 대한 폭발적인 사회적 관심은 2000년 「아동복지법」 개정으로 이어졌고, 국가는 UN이 권고한 ‘아동안전’이란 목표를 표방하면서 학대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아동학대 신고의무화, 24시간 긴급전화 설치, 아동학대 접수 및 개입체계 마련, 학대행위자 처벌규정 강화 등의 조항을 증․개설하였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아동학대예방과 보호사업을 국가 단위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 외 보호대상아동 사업

한국 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보호대상아동의 사업으로 다문화가정의 자녀를 위한 사업이 있다. 한국은 국가 간 인적 교류와 국제결혼의 확대로 증가한 다문화 가족과 그 자녀를 위해 「다문화가족지원법」(2008년)을 제정한 뒤, 다문화가족 구성원이 안정적으로 사회에 정착하고 안정적인 가족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각종 지원체제를 마련하고 있다. 특히 다문화가정의 취학 전 아동에게는 이들의 언어발달을 위하여 한국어 교육을 위한 교재와 학습을 지원하고, 취학 아동의 경우 학교생활에서 차별받지 않고 신속히 적응할 수 있도록 학과 외 또는 방과 후 교육프로그램 등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은 또한 매년 학업을 중단하고 학교 밖에서 생활하는 6~7만의 청소년들을 위해서 「학교 밖 청소년 지원에 관한 법률」(2014년)을 제정하여 이들을 위한 사업근거를 마련하였고, 여성가족부는 ‘학교 밖 청소년지원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들에 대한 정책 수립의 책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는 학교 밖 청소년의 개인적 특성과 수용을 고려하여 상담, 교육, 취업 및 진료직업체험 지원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외에도 아동의 권익향상을 위해서 ‘중앙아동권리센터’, ‘국제아동인권센터’, ‘어린이연구원’, ‘아동권리위원회’ 등이 설립 및 조직되어 인권모니터링 활동과 아동권리 확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과 제도 마련, 인식 개선 등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수용자 자녀, 사법체계 내 아동, 새터민 아동 등 정책 대상 밖에 있거나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아동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법제도 마련을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은 사회변동에 대응하여 보호대상아동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지원범위를 확대해나가며 아동보호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관민의 다양한 아동 관련 사업들을 중재할 수 있는 총괄 기관으로 아동권리보장원이 2019년 공식 출범하였다.

참고문헌
  • 김흥수 등, 2017. 서울사회복지사 제3권 현대 복지서비스. 서울역사편찬원.
  • 남찬섭 등, 2017. 서울사회복지사 제2권 현대 복지정책과 제도. 서울역사편찬원.
  • 아동권리보장원 편. 2022. 대한민국아동권리100년사. 아동권리보장원.
  • 우경연. 2013. 아동관련법과 아동복지법 변천사 연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