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민족운동과 아동의 발견 57 하며 동시에 아동권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다(김민, 안동현, 2021). 특히 유아 사망률 저하와 어린이 건강증진에 초점을 맞춘 일본의 유아애호주간25)과는 달리 아동의 인권에 초점을 맞추었다 는 점은 자못 의의가 적지 않다. 이는 1924년 국제연합에서 채 택한 「아동권리에 대한 제네바선언」보다 1년여 앞섰다는 평가다. 아이의 인권이 실낱같지도 않던 당시, 풍전등화 같은 당대의 위 기에서 미래 희망의 기표로 아동을 호출하되, 이들을 권리적 주 체로 인식하고 천명한 선구적인 일이었다. 둘째는 소년운동이 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26)에 영향을 미쳐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학생 인권의 지평을 넓히는 동 시에 시대와 사회에 대한 학생의 책무 등에도 영향을 미친 점이 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는 어렵다. 또 애초부터 청년운동의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학생독 립운동을 조명하였고(장우권, 김개지, 윤성석, 이명규, 김홍길, 2014), 학생독립운동의 기원을 조선 시대 유생들의 국가에 대한 저항의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관점27)이 커서인지(오병헌, 고영복, 이영 25) 일본의 유아애호주간은 1921년 11월 오사카에서 시작하여 1926년부터 일 본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이듬해 단오절을 유아애호데이로 정하였다. 26) 학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사회의 선진적 지식인으로서 핵심 역할을 한 대표적 집단으로 활약하였다. 그들은 민중보다 먼저 개친 교육집단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선도자로서의 자각에 충만하였고 당대 항일 민족운동의 선 두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7) 학생운동의 기원을 조선 시대 대학기관인 성균관의 유생(儒⽣) 저항운동으로 살펴보고 있는 오병헌 외의 연구(1970: 93~94)에 따르면, 당시 유생들은 국 가에 중대한 실정이 있거나 명륜풍교(明倫⾵敎)에 해가 될 만한 잘못이 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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