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아동권리역사관

제2장 민족운동과 아동의 발견 53 2. 소년운동의 발전과 분열 이런 사회적 배경과 학교 교육의 기형적 변화는 근대기 우리 사회에서 왜 서구와는 달리 탈학교 맥락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삼 는 사회적 기표가 소년이란 이름으로 호명되었는지를 설명해 준 다. 암울한 식민지 경험을 통해 일제강점기 민족의 선각자들은 자연히 사회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소년운동을 천착할 수밖에 없 었고, 잡지와 신문을 통해 때로는 종교 및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서 점차 청년과 소년이란 미래세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예 컨대 방정환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어두웠던 식민지 시절, 그가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에 왜 투신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린이란 용어를 새롭게 만들고─이기훈(2002)은 발명했다고 기술하였다─ 강연회와 잡지, 어린이문학을 통해 어린이의 순수성과 천진난만을 인간의 원형으로 삼아 인간 본연의 권리를 왜 그렇게 주장했는지 가 비로소 이해가 된다. 특히 일제강점기 소년운동에 대한 민족 적 결집은 어린이날 기념행사와 무관치 않다. 1921년 5월 천도교소년회22)가 출범하였다. 1922년 5월 1일 22) 일제강점기 전후 천도교가 주력했던 소년운동의 뿌리는 천도교의 교리 변화 (侍天主→⼈乃天)와 교리강습의 대중화, 청년운동과 밀접하다. 천도교는 1919 년 9월 2일 천도교 교리강연부를 출범시키고, 이듬해 4월 25일 이를 천도 교청년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소년운동으로 노선을 확대한다. 소파 방정환과 소춘 김기전 등이 여기에 속해 활동했다(최명표, 2011; 21~32). 청년운동에서 소년운동으로 노선이 변화하게 된 배경은 당시 일제당국의 강압을 피하려는 의도가 깃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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