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아동권리역사관

40 대한민국 아동권리 100년사 ─ 교육 영역 겨레의 새싹이자 동시에 민족해방과 독립의 등불이었고 쇠잔하는 조국을 받쳐야 할 주체였다. 암울한 식민지배의 그늘이 짙어지던 현실을 떨쳐 일어나기 위해서는 소년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 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운동에 합류하는 소년은 가급적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서일까? 당시 소년의 개념은 지금의 아동 이란 연령대보다는 광범위하였다. 당시의 사회상으로 남자는 15 세 전후에 혼인을 하던 시기였고 20세 전후의 연령까지도 소년 이라고 불렀기에 소년은 ‘수염난 아이’, ‘아이 어른’ 등을 지칭하 는 개념이었다(손인수, 1993a: 306~308; 조찬석, 1976; 한국보이스카 우트 연맹, 1974). 선행연구들에 따르면, 육당 최남선의 소년은 주 로 15세 전후의 연령을 포함하고 있으며,16) 춘원(春園) 이광수 역 시 소년을 15세 전후의 고등학생 또는 20세 내외의 전문학생의 연령집단으로 칭하고 있었다17). 또 소춘(⼩春) 김기전 역시 소년 이란 용어를 ‘이십 세 이하의 사람’으로 칭하고 있는데 초기에 그 는 소년이란 말보다는 ‘유년(幼年)’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가 나중 에 소년이란 말로 지칭하고 있었다.18) 소파 방정환은 주로 어린 16) 崔南善은 「少年」지(10권, 15쪽)에 실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어린이는 어대지던지 어린이 다울지어다. 더욱 소년은 어대지던지 소 년다울지어다”(少年, 2년 10권, 1909. 10. 15쪽). 이 글에 따르면 최남선은 소 년과 어린이를 구분하고 있고 어린이에 비해 소년을 한층 나이 많은 쪽으 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 李光洙는 「開闢」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소년 여러분! 지금 ⼆⼗歲 內外 되시는 여러 아오님들과 누의들이여”(개벽, 제17호. 1921. 11. 25쪽). 이광수는 최남선에 비해 오히려 20세의 연령집단도 소년의 개념에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RkJQdWJsaXNoZXIy MTU2Mjc2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