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아동권리역사관

제1장 한국의 전통적 아동관: 전통과 근대의 만남 39 은 1913년 「소년」의 후신으로 월간 「새별」을 창간하지만 이 역 시 1915년 1월 5일 통권 16호로 종간하게 되었다. 최남선은 이 후에도 1912년(창간호는 1913년 1월에 발행) 어린이 교양잡지 「붉 은 져고리」 창간(타블로이드판 2면, 월 2회 발행, 1913년 6월 종간), 1913년 월간 소년소년잡지 「아이들보이」 창간(1914년 9월 5일 통 권 13호로 종간), 1914년 「청춘」(1915년 국시위반으로 정간, 1918년 9 월 15호로 종간) 등 연이어 잡지를 발행하며 소년운동의 불을 지폈 다. 그는 「청춘」 창간호에서 ‘어린이의 꿈’이란 글을 썼고 여기서 쓴 ‘어린이’ 용례가 최초의 근대적인 ‘어린이’ 표현이었다. 당시 천도교는 소년운동에 초점을 맞춘 종교단체였다. 특히 천 도교청년회에 이어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해 어린이날을 제정, 1922년에 첫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07년 안창호가 발기하여 신민회를 조직하였는데 신민회 설립 목표 중의 하나가 각지에 교 육기관을 설치해 소년교육을 진흥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안창호는 1913년 5월 흥사단을 창설하였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 사 조철호는 조선소년군(후에 대한소년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설하였 고 같은 해 중앙기독교청년회의 소년부 간사 정성채가 조선소년 척후대를 결성하였다. 조선소년군과 조선소년척후대는 1924년에 소년척후단 조선연맹으로 합쳐져 우리나라 보이스카우트의 효시 가 되었다(김정의, 1992). 당시 아동관의 변화는 아동을 무엇으로 호명하느냐 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중 대표적인 용어가 바로 소년(少年)이다. 소년은

RkJQdWJsaXNoZXIy MTU2Mjc2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