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아동권리역사관

어린이날의약속,그후 100년

005 발간사 발간사 아동권리 100년, 그순간에우리가있습니다 이책의씨앗은 아동권리보장원의설립입니다. 2019년 2019년 7월 16일은아동권리보장원이시작된날입니다.이날은아 동권리보장원이아동권리실현의중심기관으로서어떤길을만들어 갈지모두가주목하는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우리에게는사회로부 터부여받은책임과사명을어떻게풀어가야할지에관한두려움과 희망이공존하는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당면한 과제는 넓어지고 책임은 더 깊어졌습니다. 이러한상황에서우리는우리의자리가자랑스럽기도두렵기도했습 니다.때로는가야할길의아득함과지켜보는이들의기대가벅차기

006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도했습니다.하지만,그때마다우리는‘아동권리실현’이라는가치를 되새겼습니다. 이것은아동권리보장원의초심이며비전이기때문입 니다. 이책이시작된 그날을기억합니다. 2020년 2020년 1월, 새로운한해를열며직원들과이야기를나누었습니 다. 새해아동권리보장원의희망과사명에대해얘기를나누다아동 권리의미래설계는지나간시간에대한역사성이해에뿌리를두어 야한다고생각을모았습니다.그리고어린이날 100주년을맞이하며 흩어진아동권리의역사를아동관점에서정리할필요가있다는점에 모두공감하였습니다.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는바로이런필 요와공감에서시작되었습니다. 작업을추진하는첫발걸음으로,편찬위원회를구성하였습니다.아 동권리의 100년역사를제대로정리하기위해서는전문적이고신망 있는 편찬위원의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아동에 대한 이해 뿐아니라,깊은역사의식,아동을최우선으로보는관점과태도를지 닌학계와현장전문가의고견이필수적이었습니다. 다행히이책의 가치에공감하며기꺼이참여의사를밝혀주신김민,안동현,이봉주,

007 발간사 이양희, 이완정, 이호균, 제철웅, 허남순선생님과내부위원으로구 성된편찬위원회가출범할수있었습니다. 이책은열띤토론과 오랜숙고의산물입니다. 2021년 100년의역사를만든주인공인아동과선각자들이없었다면한글 자도써내려가지못했을것입니다.그리고시간속에묻혀있는자료 를찾아내글로풀어낸편찬위원의노고가없었다면이책은세상에 나올수없었을것입니다. 100년의역사를찾아내어정리하고,글을쓰는작업은생각보다쉽 지않았습니다. 편찬위원과다수의집필진, 그리고실무진은역사의 찰나를포착하기위해자료를찾고다듬는길고방대한작업을해내 야했습니다.그리고이책의목적에최대한부합하면서,어느편에도 치우치지않는균형을유지하기위해오랜시간끊임없는토론을이 어갔습니다. 3년의긴시간동안지나온 100년의발자취를소중하게 다루면서이책을완성하였습니다.

008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무거운책임감으로 이책을펴냅니다. 그리고, 2022년오늘 이책에는지난 100년간우리나라아동의삶이고스란히담겨있 습니다. 어느시대든아동의삶을위해목소리를높인, 깨어있는리 더로인해많은변화가나타났습니다.그러나이들뒤에는묵묵히제 자리에서 헌신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동권리의 발전 만있었던것이아니라후퇴했다고평가할수있는부끄러운과거도 있었습니다.우리는이모든것이아동의삶이기에,모든역사를온전 히기술하였습니다.대한민국아동권리의역사는아동가까이에있거 나아동을위해일한사람만이아니라,모든사람이만들어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그러한내용이가감없이담길때, 이책이과거 100년을성찰하고,향후 100년을준비하는가치있는지침이될것입 니다.아동의권리를지키기위해목소리를내고희생한당신,그리고 우리 모두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한 일을 함께해주실 당신을기대합니다. 아동권리보장원이설립되었지만, 아동권리라는말이우리의일상 에당연하고자연스럽게스며들게되기까지는아직많은숙제가남아 있습니다. 아동권리보장원은그책임을다시한번무겁게느낍니다. 그것은이책이우리에게준무게이기도합니다.아동과관련한모든 순간에아동권리보장원이함께하겠습니다. 그리고이러한노력의결

실로, 100년후쓰게될《대한민국아동권리 200년사》에는아동권리 보장원이아동권리발전의주춧돌로기록되기를꿈꾸어봅니다. 제100회어린이날을맞은오늘, 아동이행복한세상을꿈꾸는모든이들에게 이책을드립니다. 2022년제100회어린이날에 아동권리보장원원장윤혜미

011 프롤로그 프롤로그 100주년을맞이하는 어린이날에 ‘아동권리 100년’을 돌아보며 2022년 5월은천도교소년회에서어린이날을제정한지꼭 100년 째되는날입니다.또한그이듬해인 1923년조선소년운동협회가천 도교당에서처음으로어린이날을기념하는행사를개최한때이기도 합니다. 그런점에서제100회어린이날인 2022년 5월 5일은대한민 국아동권리의역사에서매우뜻깊은날입니다. 1910년경술국치이후조선의민족주의자들은국권을회복하기위 해다방면의노력을기울였습니다. 특히 1919년 3월 1일, 서슬퍼런 식민지치하에서도민족지도자와청년학생들이대거참여하며전국 에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의함성은독립을향한한민족의의지 를널리알리는계기가되었습니다. 하지만일제의강력한탄압으로 독립운동세력은크게두가지길을걷게되었습니다.그하나는나라 밖에서임시정부를세우거나항일무장투쟁을벌이는길이었고, 다른

012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하나는 나라 안에서 실력을 기르며 훗날을 도모하는 길이었습니다. 소파小波 방정환을비롯하여 1920년대에소년운동을주도했던선구 자들은후자의방법을취하며‘희망’과‘내일’을도모한분들입니다. 아동권리는물론인권이란말조차낯설던 100년전에,그것도국권 을상실한식민지조선에서어린이날을제정한것은어떤의미였을까 요? 1923년조선소년운동협회가주최한첫번째어린이날행사의다 음과같은슬로건에서그의미를엿볼수있습니다. 희망을살리자,내일을살리자! 잘살려면어린이를위하라! 이와더불어그날행사에서주최측은‘소년운동의기초조건’, ‘어 른에게드리는글’, ‘어린동무들에게’ 그리고 ‘어린이날의약속’ 등 네가지 ‘어린이선언’을발표하였습니다. 행사를마치고 200명의소 년들이경성시내를네구역으로나누어집집마다‘어린이날의약속’ 이라는전단을돌렸습니다. 이는 1924년 9월 26일국제연맹이채택 한제네바아동권리선언보다 1년이상앞선선언이라는데그의미가 있습니다.엄혹한민족사의암흑기에도‘내일의희망’을‘어린이’에게 서찾은선구자들의노력과혜안이빛나는순간이아닐수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100년의 아동권리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만큼이나 험난했습니다. 19세기에이르러서양의근대문명이조선에들어오 기전까지, 가부장중심의전통사회에서아동은사실상그존재감이

013 프롤로그 크지않았습니다.그것은비단우리나라만의문제는아니었고,제1차 세계대전이막을내리기전까지구미선진국에서도사정은마찬가지 였습니다.그런차원에서 1989년채택된유엔아동권리협약은아동권 리의 4대기본원칙(비차별, 아동이익최우선, 생존·발달권, 아동의견존 중)과 4대기본권(생존권·보호권·발달권·참여권)을중심으로사회의한 시민으로서아동의존재와그권리를천명하였다고할수있습니다. 그러다 19세기후반개항과더불어조선에들어온서양근대문화 와계몽주의의영향으로개화사상을받아들인선구자들에의해아동 에대한관심이더욱깊어지기시작합니다.특히가톨릭과개신교선 교회에서근대식학교와보육시설을만들고,마찬가지로민족계몽을 위해조선의유력자들도여기에동참하면서아동의생존권과교육을 포함한발달권을이루기위한노력이이루어집니다. 1923년첫어린 이날에만방에펼친네가지어린이선언은이러한노력의결과였습니 다. 하지만아동들의권리는그뒤로도여전히불안하고위태로웠습 니다.일본의민법에기초한호주제가일제강점기에식민통치의일환 으로이땅에강제되었고,이로인해아동은집안의재산으로여겨졌 고, 전시동원령의희생양이되기도하는등기본적인생존권과발달 권조차지켜지지않은경우도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마침내해방을맞이하고독립국가를수립하기까 지의 3년은극도의이념대립으로혼란스러운시기였습니다. 1948년 어렵사리제헌의회를구성하고남한단독정부를수립한뒤 2년이채 되기도전에한국전쟁이발발하고, 전쟁을치르는 3년동안이땅의

014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아동들은더없는위기에처합니다. 전쟁의가장큰피해자일수밖에 없는아동은전쟁의참화에고스란히노출되었습니다.특히전쟁고아 가쏟아지는상황에서아동의생존과발달을위한지원은모두해외 원조에의존할수밖에없었습니다.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로 접어들어 국가 재건이 본격화되자 아동에대한국가의관심이점차커지기시작합니다. 1949년교육법 이제정되면서법제상의무교육을시행하고, 전쟁참화를딛고국가 의기능이정비되자 1957년 5월 5일 ‘대한민국어린이헌장’을제정 하고선포합니다.더불어보건사회부부녀국에첫번째아동담당부서 인 ‘아동과’를신설합니다. 1961년아동복리법을제정하고, 1963년 에는보건사회부보건국내에 ‘모자보건과’를신설하는등행정부에 서아동의권리와복지를확립하기위한노력을조금씩기울입니다.그 러나실제는국가재건과경제개발이라는국가적과제앞에아동권리 의현실은그리밝지않았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이르러서 도가정내여아女兒와남아男兒 사이의차별이여전했으며,법과제도 의미비로권리의사각지대에놓인아동들은힘겨운시기를견뎌야했 습니다. 권위주의시대를지나 1990년대로접어들면서경제적성장과정 치적안정을기반으로대한민국의아동권리도한걸음큰도약을이 룹니다. 1991년,우리정부는유엔아동권리협약을비준하고,그후속 조치로국내법개정에착수합니다. 영유아보육법과청소년기본법제 정으로유엔아동권리협약당사국의위상에맞는제도개선에나선것

015 프롤로그 입니다. 1992년전국의 25개민간단체가참여하는‘어린이와청소년 의발달을위한전국협의회(1994년‘한국아동단체협의회’로개칭)’가창 립되는등국가와민간이함께아동권리에대한제도와법을보완하 기에이릅니다.그리고 2002년에는한국정부가의장국을맡은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아동대표 2명이 참석하면서 아동의 참여권을 일부 실현하는성과를거두기도합니다. 아동권리를확산하기위한노력은오늘날까지꾸준히이어져 2005 년호주제의폐지, 2010년경기도교육청의학생인권조례제정, 2016 년대한민국아동권리헌장제정및선포, 2019년아동권리보장원설 립등의결실을보았고, 2021년고교무상교육실시와함께민법상 징계권조항이삭제되어사실상 63년만에자녀징계권이폐지되는새 로운도약의순간을맞이했습니다. 식민지시대를거쳐독립정부의수립과한국전쟁,국가재건과권 위주의시대를지나오늘에이르는파란만장한한국근현대사에서아 동권리는여러굴곡을거치면서도조금씩발전해왔습니다. 특히, 아 동권리 100년의역사를돌아볼때어려운상황에서도아동권리증진 을위한여러민간단체들의노력이중요한역할을담당해왔음을확인 할수있습니다. 국가권력이부재할때도, 국가가전쟁을수행할때 도,국가재건과경제성장을위해아동의희생을강요할때도아동의 편에서그들의권리를수호하고, 바르게성장할수있도록애써왔던 여러민간단체들의노력덕에위기에처한아동도성장의기회를얻 을수있었고,국가도방향을바로잡을수있었습니다.어린이날제정

016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100주년이자제100회어린이날을맞아지난 100년간의아동권리의 역사를돌아보면서소년운동의길을열었던선구자들을비롯하여,여 러단체와기구그리고활동가들에게고마운마음을전합니다. 역사 는그분들이흘린땀과눈물로한걸음한걸음아동권리의확립과확 산을향해나아갔기때문입니다. 이책은지난 100년동안의대한민국아동권리역사를돌아봅니다. 7개분야의전문가들로이루어진편찬위원회가 2년남짓자료를정리 하였고,그자료를바탕으로아동권리 100년의역사를정리하였습니 다. 수차례에걸친논의끝에 1923년제1회어린이날을기점으로다 섯시대로구분하고,그전사를하나로넣어모두여섯장으로아동권 리의역사를정리하였습니다. 각각의시대를개관하고, 이땅에아동 권리의씨앗이어떻게뿌려졌고, 뿌리를내렸는지, 그리고싹이돋고 꽃을피우고결실을맺어가고있는지그과정을살펴보는데중점을 두었습니다.부족한점이많으나,이는추후의과제로남기고훗날좀 더보완되기를바랍니다. 끝으로 100년전처음개최된어린이날행사이후경성시내에돌려 졌던전단의내용, ‘어린이날의약속’을다시읽어봅니다. 100년전 아동권리의선구자인방정환선생의이약속은여전히우리가슴에깊 은울림을남기며, 우리가어린이를어떻게만나야할지되새기게합 니다.그울림이,그되새김이,또이책의세세한기록들이우리마음 에터를잡아대한민국아동권리를지켜가는힘이되길기대합니다.

017 프롤로그 어린이날의약속 우리들의희망은오직한가지어린이를잘키우는데있을뿐입 니다. 다같이내일을살리기위하여이몇가지를실행합시다. 어린이는어른보다더새로운사람입니다. 어린이를어른보다더높게대접하십시오. 어린이를결코윽박지르지마십시오. 어린이의생활을항상즐겁게해주십시오. 어린이는항상칭찬해가며기르십시오. 어린이의몸을자주주의해보십시오. 어린이에게잡지를자주읽히십시오.

차례 발간사 아동권리 100년,그순간에우리가있습니다. 005 프롤로그 100주년을맞이하는어린이날에 ‘아동권리 100년’을돌아보며 011 1 한국의전통적아동관:전통과근대의만남 구한말에서 1923년이전까지 시대적배경 025 전통적아동관의변화 031 근대적의료체계의시작과아동보호및교육활동 047 2 민족운동과아동의발견 1923년~1944년 시대적배경 059 가부장개념의도입과왜곡된호주제의등장 070

근대적아동관이반영된법제도의사례와 아동존중사상의확산노력 075 아동보호와교육및의료체계의발전 080 아동권리개념의대두와소년운동 090 3 국가재건과아동권리 1945년~1960년 시대적배경 099 전쟁이후의아동들 109 보건의료체계의확립과아동교육 125 민법의탄생과호주제의법제화 134 아동권리의성장과법제도의제정 142 4 아동권리의형성기 1961년~1990년 시대적배경 153 민법의개정과단계적변화과정 158 아동복리법의제정과진화 163 보편교육의확대 174 아동의생명과건강을위한사회적장치 179 아동권리옹호를위한활동과시대적한계 187

5 아동권리의성장기 1991년~2004년 시대적배경 201 유엔아동권리협약의영향 216 호주제폐지를위한움직임 229 다양한보호정책의제도화 231 아동권리,청소년연령대로까지확대 243 6 아동권리의확산기 2005년이후 시대적배경 251 유엔아동권리협약으로인한변화 253 호주제폐지의의미와영향 259 교육현장에서의아동권리보장을위한과제 273 아동권리확산을위한노력 282 에필로그 아동권리가완전히보장되는대한민국을위하여 327 아동권리보장원연혁 333 부록 아동권리 100년사연표

일러두기 ● 본문의일부용어는해당시대에사용된용어를그대로명시하되, 첫번째용어서술시()안에현대기준의사용용어를붙였다. ● 법률명의띄어쓰기는법제처국가법령정보센터의사례를따랐다.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1 한국의전통적아동관:전통과근대의만남 구한말에서 1923년이전까지 전통적아동관과서구의계몽사상

024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이시기의특징 이시기는그동안조선을지탱하던국가시스템은물론면면히이 어져오던전통까지모든것이흔들린혼돈의시기였다.그리고거듭되 던혼란중에국권을잃고일본제국주의의가혹한식민통치가시작된 고난의시기였다.전통의붕괴와혼란가운데서도조선은오랜유교적 전통사회의영향에서쉽게벗어날수없었다.따라서유교적애민사상 에따라아동을긍휼히여기기는하였으나,본질적으로아동을주체적 인존재로인식하기보다수동적이고순종적이며성인을따르는존재 로여겼다. 하지만동학운동을통해아동존중사상이싹트고외국의선교사들 이조선에와아동의교육과구호를위해힘쓰면서변화의움직임이 일어났다.그결과, 1922년어린이날을제정하는등아동을독립적인 격체이자권리의주체로바라보는시각이생겨나기시작했다.이에앞 서일부아동들은 3·1운동에서자신들의목소리를냄으로써부당함과 차별,억압에당당히저항하는존재임을스스로증명해보이기도했다. 그럼에도아직전통적가치관이만연했던탓에대부분의가정에서 아동은여전히노동력으로만치부되었으며, 독립적인인권의주체로 인식되지않았다.이에따라가정에서는물론사회에서도차별적인대 우를받아야했다.또한사회의여러여건도녹록치않아아동의보육 및구제활동,보건의료사업은국가가아닌외국선교사들과개화사상 을습득한일부지식인및선각자들에게의존해야했다. 정리하자면이시기는전통과근대가만나충돌하면서여러파열음 이발생하고,전근대에서근대로넘어가는과도기적성격이강했던때 였다.동시에이후의민족운동과아동의발견을위한전야前夜의시대 이기도했다.

025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시대적배경 조선왕조의몰락,그리고일제강점기의시작 우리는대한민국아동권리역사의출발점을 1923년 5월 1일, 조선 소년운동협회가주최한제1회어린이날기념식으로삼았다.본격적으 로이 100년의역사를돌아보기전에먼저그이전의시대적상황이 어떠했는지를살펴보고자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시기인 19세기 에이르러아시아동쪽끝에위치한조선왕조에까지서구열강의세 력이힘을뻗쳐왔다.조선을삼키려는세력은구미열강뿐만이아니 었다.서구의근대화에자극을받은청나라와일본역시조선을자신 들의 세력권에 넣거나 식민지로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나라안팎의위기와위협이가중되는사이, 조선왕조는국권을지키 지못하고역사의뒤안길로사라지는운명을맞이하고, 일본제국주

026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의의식민지로전락하고말았다. 지금부터는바로이시기, 구한말부 터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초기까지조선의아동이처한현실과 아동을바라보는시각은어떠하였는지살펴보도록하자. 한마디로이시기는 500년을이어온조선왕조의모든것이흔들린 혼돈의 시기였다. 그리고 우리 역사의 최대 수난기인 일제강점기가 시작된고난의시기였다. 19세기말의조선은내우외환으로날로쇠 약해져갔다.안으로는외척들에의한세도정치로곪아갔고,밖으로는 서구세력이힘을뻗어오고있었다.고종이등극한후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세도정치의폐해를바로잡으려시도하였으나시대의변 화에적극적으로대응하지못하고쇄국으로일관한탓에위기를벗어 나기엔역부족이었다. 마침내병인양요, 신미양요등외세의침입을 겪었고이후미국을시작으로영국, 독일, 일본과조약을맺는한편 임오군란의내홍까지겪었다. 이과정에서조선에도개화사상이유입되었고, 1884년에는개화사 상가들이주도하여갑신정변을일으켰다.하지만이는단삼일천하로 막을내렸고, 정국은다시혼란에빠지게된다. 이런가운데 1894년 보국안민輔國安民과척양척왜斥洋斥倭의기치를들고동학농민운동 이일어났는데, 이를진압하는과정에서청일전쟁이발생했다. 조선 의국운이심각하게기운이때의일을조금더자세히들여다보자. 삼남에서일어난동학군이파죽지세로북상하자이에놀란조선조 정은청나라에지원군을요청하였다. 그러자갑신정변이후청일두 나라간에맺은톈진협정에따라청나라가군사를파견하며일본에게

027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파병사실을알렸다. 이에일본도 ‘조선내의자국민을보호한다’는 명목으로조선으로병력을파병했다.청일두나라의파병소식을들 은농민들은이들에게빌미를주지않기위해스스로해산하였지만, 인천항을통해입국한일본군은이때를놓치지않고경복궁을점령해 버렸다. 이에청나라가항의하자, 일본은동학군을진압하기위해남 진하던청군을공격했고, 이때문에전쟁에불이붙게되었다. 청일 두나라는조선의강역에서전쟁을벌였고,결국전쟁은일본의승리 로막을내리게된다. 이후조선내에서일본의입김이점점커지며친일세력에의한개 혁이시도되었다. 이에고종은 1897년국호를 ‘대한제국’으로바꾸 고, 자체적으로왕실중심의개혁을시도하며상황을바꿔보려노력 하였다.하지만 1904년한반도의주도권을쟁취하기위해벌어진러 일전쟁에서마저일본이승리함으로써조선은더이상일본을막아낼 힘이없게되었다.결국 1905년일본의강압에의해외교권을일본에 넘긴다는을사늑약을체결하고, 다시 5년후인 1910년일본은조선 을강제병합하였다.이로써 500년역사의조선은그명을다하고이 후 35년동안엄혹한일제강점기가이어졌다. 일제강점기의첫 10년은무력을앞세운‘무단통치’의시대였다.이 에조선인들은뜻있는선비와백성들이의병활동을벌이며저항했지 만일제의무자비한탄압에대부분북쪽국경을넘어만주와중국등 으로근거지를옮겨항쟁을이어나가야했다.한편으로는구한말부터 민족자강民族自彊의뜻을지닌지식인들을중심으로민족교육을위

028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한학교설립,국채보상운동등민족의자주를위한운동이일어났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윌슨의민족자결주의영향을받은 3·1만세 운동이전국에걸쳐들불처럼번져갔다.비록일제의잔혹한폭력진 압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3·1만세운동은 일제가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는계기가되었다. 일제는문화통치의일환으로 1922년 2차조선교육령을공포했다. 한일합방직후인 1911년발표된 1차교육령이‘순종적인신민양성’ 이 목적이었다면, 2차 교육령의 핵심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이었다. 말인즉슨 ‘조선인과일본인의차별을없애고일본과동일한제도로 다스린다’는구호였지만사실속이뻔히보이는수법이었다.이때일 본과동일하게학제도개편됐는데,표면적으로는일본인과조선인아 동이평등하게교육받는것처럼보여도‘국어(일본어)를사용하는자’ 라는표현으로일본어를사용하는자가조선인보다상위존재라는전 제를깔아사실상차별을강화하는수단에불과했다.그이면에는일 본어와일본역사교육을더욱강화하여우리민족의사상을일본화하 고 말살하려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음흉한 목적이 도사리고 있었 다. 이처럼이시기는조선의국운이다하고, 치욕적인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혼란과비극의연속이었다.

029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국제적환경과아동보호를위한움직임 그럼이시기의국제적환경은어떠했을까.당시는동서양을막론하 고그야말로제국주의의각축장이었다. 산업혁명을거쳐자본주의가 대두됨에따라영국과프랑스그리고독일을비롯한몇몇나라들은원 료를공급받고팔아넘길시장을확보하고자약소국을식민지삼는일 에몰두하였다. 일명 ‘해가지지않는나라, 대영제국’이라는표현은 당시의식민지쟁탈전이얼마나전지구적으로일어났는지를극명하 게보여주는예이다.자본주의국가들의식민지쟁탈전은 1914년에이 르러마침내전세계를제1차세계대전의폭풍속으로몰아넣었다. 1914년 7월 28일,오스트리아가세르비아에선전포고를하면서시 작된이전쟁은 1918년 11월 11일독일이항복하기까지 4년동안치 러졌다. 최초의 세계대전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연 합국의승리로막을내리고이후체결된베르사유조약으로전후처 리방식이결정되면서전쟁을도발한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등 동맹국은전쟁에대한책임을져야했다.그리고이때전쟁의결과로 ‘국제연맹’이창설되기에이르렀다. 이처럼제국주의전쟁으로여러나라가몸살을앓던당시에도아동 의권리에서눈여겨볼만한진전이있었다. 1922년 1월, 국제연맹이 사회는 ‘여성과아동의인신매매에관한자문위원회’를설치하였다. 또한 국제연맹 산하에 국제노동기구(ILO)가 설립됐고, 아동보호에 대한여러협약도채택됐다.이른바노동을할수있는최저연령을정

030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한것인데, 1920년채택한 ‘제8호선박의멸실또는침몰의경우실 업보상에관한협약’을시작으로, 1921년농업과석탄부, 1932년비 공업적노무부분에서최저연령(공업분야에서는만 12세미만아동,해상 및농업분야에서는만 14세미만아동의고용및노동금지) 협약이채택되 었다.또한밤 10시에서새벽 5시사이에는 18세이하의연소자를공 업사업체에고용하지못하도록규정하는등국제적으로아동의인권 에관심을기울인첫사례가되었다.

031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전통적아동관의변화 한국의전통적아동관 그러면전통사회에서는아동을어떻게바라보았을까.먼저근대이 전오랜세월한국인의삶에깊은영향을미쳐왔던무속, 불교, 유교 를살펴보자. 그리고이어서근대에등장한동학에서아동을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간단히짚어보면전통적아동관이어떻게변화했고 그것이어떤의미를지니는지더쉽게이해할수있을듯하다. 무속은근대이전부터한국인의삶에깊은뿌리를내리며그생명 력을이어왔다. 일종의기층신앙이었던무속신앙은삼국시대에불 교가전래된이후에도불교와공생하며여전히백성들의삶에영향을 미쳤다. 그뿐만아니라강력한유교국가를지향한조선의왕실에도 성수청星宿廳이라는왕실무속기관이존재했을정도로무속은우리

032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의전통과떼려야뗄수없는관계에있었다.그런무속에서는아동을 ‘신이점지한우주적존재이자신적존재’로파악하였다.무속의관점 에서보면아동의출생은애초에신에의해점지되는것이다.영험한 신에의해점지된아동은엄마뱃속에서 10개월간신의지극한보호 아래자라며, 출생시에평생의 ‘명’과 ‘복’을받고세상에나온다고 보았다. 다시말하자면인간과아동을우주적이고신적인존재로, 그 자체로완성된하나의인간으로본것이다. 삼국시대에한반도로전해진불교는오랜세월이땅의사람들에게 가장영향력있는종교였다.삼국이쟁투를벌이던당시에각국은경 쟁적인불사를통해국가의안녕과번영을빌었으며, 불국정토를만 들겠다는뜻을펼쳤다. 고려왕조도불교를국교로삼고, 고승을국사 로임명하여국가운영에참여케하였다. 이렇듯왕실에서는물론이 고 민간에서도 불교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전생의업’에의해현세가결정되고 ‘현세의업’으로내세가 결정되는인과론적존재로본다. ‘내가전생에무슨죄를지어서이러 나’라는사람들의푸념은바로이런불교적시각에서나온표현이다. 어쨌든인간은이처럼업보와윤회에종속된운명속에살지만,개개인 에게는불성佛性이있으므로올바르게수행한다면모두궁극적인깨 달음의경지에올라성불할수있다고믿었다. 아동을바라보는관점 역시마찬가지였다.아동을불성을가진존재로여기고,불완전하고미 성숙한아동을아직세속에물들지않은이상적인간이라고보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주요 이념이었던 유교에서는 아동을 어떻

033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게 바라봤을까. 성리학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조선시대에는 ‘효’ 와 ‘충’을중심으로한삼강오륜三綱五倫과효제충신孝弟忠信의가 치가강조되었다.따라서아동에게도당연히이러한덕목을습득하고 실천할것을강력히요구하였다. 효는유교의중심사상으로자녀교 육에서중요하게부각되었고, 자녀가행해야할가장근본적인의무 로여겨졌다. 따라서조선시대의아동은아직미성숙하고부족한존 재이며, 유교적가르침을바탕으로 ‘수신修身’하여성숙해져야한다 고 강조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아동을 독립적이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기보다는가족에게종속된존재,무조건윗사람을공경해야하 는존재, 효를실천해야하는존재로여긴것이다. 또한같은아동이 더라도남아와여아를차별적으로대우했던모습도쉽게확인할수 있다. 아무래도조선이역사적으로현재와가장가까운시대이다보 니이러한아동관이기성세대를중심으로오늘날까지남아있는것으 로보인다. 물론전통적아동관이아동의권리에전혀주목하지않았냐고묻는 다면반드시‘그렇다’고할수는없을듯하다.아동연령기를여러단 계로나눠거기에깃든의미를다양하게해석했던것도사실이다.예 를들자면유년기에서아동에이르는연령기를아해兒孩, 유자幼子, 동자童子,동치童穉,동몽童蒙,동츤童齔,해제孩提,해동孩童,유자 孺子,동진童眞 등으로다양하게불러왔다.하지만이러한시각은분 명서구의관념과는사뭇다르다. 아동을그자체로하나의우주, 곧 소우주적존재로사유하려는경향이강했고, 이런관점은종교적색

034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채와함께유교의도덕적·훈육적사상과도연결돼있다.정리하자면 전통적아동관은응당무속과신화,불교,유교와밀접하게연결될수 밖에없고인격적도야와도덕적섭리의논리가깊게배어있었다고 할수있다. 서구의아동계몽사상 그렇다면이러한전통적아동관에균열을일으켰던서구의아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땠을까. 한국의 아동관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 피기위해서구의아동관변화과정을참고하는게좋을듯하다. 사 실서구사회에서도근대이전에는아동을하나의인격체로보기보다 는인간중가장미천한존재로여겼다고한다. 심지어 ‘중세이전에 는아동이란개념조차존재하지않았다’는일부의주장도있다.사회 와어른의필요에따라아동의존재는묵살됐으며,때때로영아는유 기되거나사고팔리는등희생의제물이되기도했다. 그렇다면어디 에서부터변화가시작된것일까. 르네상스를거치고 17세기에이르면서서구에서는아동기의독특 성과독립성에대한인식이형성되었다.그리고 18세기에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거치면서대두된‘개인’의개념,자본주의,자유주의그 리고낭만주의가아동과어른사이의개념적분리를공고히했다.이 후철학과심리학분야에서도아동기를인식하기시작했고, 결국서

035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구사회는아동에대한개념을완전히새롭게창조하였다. 아이들은인간으로태어나며또한자유롭게태어난다.그들의자 유는그들의것이므로다른어느누구도그것을마음대로할권리 는없다. 1762년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위와같이주장했는데, 쉽게말 해아동을권리와자유의주체로인정하고, 자유를실현하고행복을 추구할권리를가진존재로인정한것이다. 아동을바라보는관점이 과거와는확연히달라지는지점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로 인해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가정에서 사교육 형태로 이루어지던 아동교육이 ‘학교’라 는공간에서공공교육의형태로발전하는계기가되었다. 교육이아 동의주체적능력을발현시킴으로써인격적존재로거듭나게하는사 회적장치가된것이다.그리고이러한루소의관점은이후바제도우, 페스탈로치, 존듀이의진보주의적교육론에영향을미쳤다. 그렇다 면 조선에서는 언제 이러한 아동존중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을까. 지금부터살펴보자.

036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동학의인간평등이념과아동존중사상 우리나라근대의아동존중사상은 18세기들어조선에서창시되어 퍼지기 시작한 동학에서 비롯되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모든 사람은 상하귀천上下貴賤 없이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 신 앙’에의해군자가될수있고,평등한인격적존재로인정받을수있 다고주장했는데, 이러한사상이바로동학의기본교리였다. 유불선 의가르침과서학의교리에서도일부영감을얻은이사상은당시의 그어떤교리보다인권사상을중심가치로삼았다는점에서놀랍다. 이는 2대교주최시형에의해좀더정교하게다듬어져인간평등의 이념으로제시되었다.인간의존엄성을중시하여모든인간을본질적 으로동등하고평등한존재로인식해야한다고바라본것이다. 기존 의전통적사상과비교하면가히혁명적발상이라할만하다.기존의 유교가정치적으로이데올로기화되어특정계층을옹호하는수단으 로변질되었다면동학은전통적하늘의개념을새롭게해석하여근대 적인간존중,인간평등의이념과결부시킨것이다. 이논리로보면사람이하늘이고, 아동역시평등하게사람이므로 이는근본적으로아동존중사상과도맞닿아있다.최시형이교인의생 활규범을다룬〈내수도문內修道文〉에이러한관점이잘나타나있는 데,한번들여다보자. 어린아이도한울님을모셨으니아이치는것이곧한울님을치는것

037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이오니,천리를모르고일행아이를치면그아이가곧죽을것이니부디 집안에큰소리를내지말고화순和順하기만힘쓰옵소서.이같이한울님 을공경하고효성孝誠하오면한울님이좋아하시고복을주시나니,부디 한울님을극진히공경하옵소서. 3대교주인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그명칭 을바꾸게된다.그이전까지는주로교단내의문제와교육계몽활동 에힘써오다가제1차세계대전이후에는 3·1운동에주도적으로참여 하는등좀더적극적으로사회에나서기시작했다.천도교청년지도자 들은 1919년 9월‘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조직하였고,이듬해 4월 이를‘천도교청년회’로확대·개편함으로써조선의신문화를향상및 발전시킨다는새로운목적을추구하기시작했다. 한가지사실을덧붙이자면어린이날을만들고아동인권을주장한 소파방정환이바로손병희의사위다.훗날그가‘어린이가곧 님’ 이라는근대적아동관과교육관을내세우면서한국의전통적아동관 과아동교육사상의획기적인전환점을마련할수있었던건바로이 천도교 사상의 영향 덕분이었다. 따라서 한국 아동권리의 역사에서 천도교는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다.

038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여러소년잡지의창간과‘어린이’의등장 외세에의한개방압력을거세게받던 19세기말에이르러서구선 교단체들도하나둘이땅에발을들이기시작했다.막을수없는시대 의흐름이었다. 이런와중에조선에들어온선교사들은아동을대상 으로한구호및자선활동을전개했다.그과정에서아동에대한서구 사회의인식이자연스럽게녹아들었을것이다.한편으로는앞에서언 급한천도교의영향을받은여러소년잡지들이창간되면서이땅에 아동기개념이탄생하는기초를다지기도했다. 1906년최초의청소년잡지《소년한반도》가창간된것을시작으로 최남선이 1908년《소년》, 1912년에는《붉은저고리》를발행했고,천 도교청년회는 1920년《개벽》이라는잡지를창간했다. 여기서한가지의문이생긴다. 당시로서는조선사람들에게분명 낯선매체였을잡지가어떤이유로이렇게갑자기많이나타난것일 까. 이는굉장히현실적인이유때문이었는데, 개화기아동들이문화 와사상을통해민족의식을갖게하기위해서였다. 또한전통사회에 서아동을수동적이고의존적이라고만보던것과달리아동도자신의 생각을발달시켜나갈수있다는인식이반영되었기때문이었다. 다 시말해아동을바라보는시각이바뀌었다는것을나타낸다. 이처럼 소년을민족의미래로파악하는관점은최남선의《소년》 간행취지에 잘드러나있다.

039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나는이잡지의간행하는취지에대하여길게말씀하지아니하리라. 그러나한마디간단하게할것은“우리대한으로하여금소년의나라로 하라. 그리하려하면능히이책임을감당하도록그를교도하여라.” 이 잡지가비록적으나우리동인은이목적을관철하기위하여온갖방법 으로써힘쓰리라.소년으로하여금이를읽게하라.아울러소년을훈도 하는부형으로하여금도이를읽게하여라. 천도교청년회에서창간한잡지 《개벽》은교과서에도자주언급되 었던만큼익숙한독자들이많으리라짐작된다.이잡지는청년문제, 신구사상의충돌, 교육및노동계의사회운동동향, 부인및여성해 방, 구습타파등사회적현안에관한기사를주로게재했다. 여기서 도아동을바라보는근대적관점을엿볼수있다. 이러한잡지의홍수속에서눈여겨볼대목이있는데,바로이때여 러사람들이근대적인의미가담긴‘어린이’라는용어를사용하기시 작했다는점이다. 1914년《청춘》에서최남선이이용어를사용한것 으로확인된다.그리고그로부터 6년뒤인 1920년에는《개벽》 3호에 서방정환이마찬가지로어린이라는용어를사용했다. 어린이는 어린아이의 순우리말로 ‘늙다’에서 파생된 늙은이, ‘젊 다’에서 파생된 젊은이라는 말처럼 ‘어리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보 인다.이전까지전통사회에서아동을‘아해’, ‘얼라’, ‘애새끼’, ‘어린 놈’, ‘꼬마’, ‘새끼’등멸시하는호칭으로불렀던것에비교하면아동 을어른과동등한인격체로존중하자는평등사상을드러낸용어라고

040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할수있겠다.또한이처럼아동을다른생애주기와구별하여지칭한 것은아동권리의측면에서큰의미를지니며,바로아동에대한인권 의식의시작이라평가할수있다. 이돈화는 《개벽》에서 “어린이가 수직적 상하관계 속에서 약자로 천대받고있다”고피력하면서이들의인권을보장해야한다고주장 했으며,미국과영국의사례를참고하여“아동을보호할수있는기관 을설치해운영하라”거나“아이들에게교육받을기회를마련하자”는 의견을제시했다.노아자도《개벽》에게재한글에서“조선민족의운 명은소년남녀에게달려있다”고표현하며 “교육으로개조된소년남 녀만이조선의운명을변화시킬수있다”고확신하며기대감을드러 냈다. 김기전은 〈장유유서의말폐소년남녀의해방을제창함〉이라는 글을통해전통사회의소년관을비판했다. 한편여러소년운동단체중이론과조직측면에서단연뛰어났던 천도교소년회는조직구성 1주년을기념하고자 1922년 5월 1일을어 린이날로선포했다.또한소년을보호하자는내용의전단을배포하면 서대중에게아동을어떻게대해야하는지알리려노력했다. 一,어린사람을헛말로속히지말아주십시오. 二,어린사람을늘갓가히하시고자조리야기하여주십시오. 三,어린사람에게경어를쓰시되늘부드럽게하여주십시오.

041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四,어린사람에게수면과운동을충분히하게하여주십시오. 五,리발이나목욕가튼것을때맛처하도록하여주십시오. 六,낫분구경을식히지마시고동물원에자조보내주십시오. 七,장가와 싀집보낼생각마시고사람답게만하여주십시오. 현대어설명 하나,어린사람을빈말로속이지말아주십시오. 둘,어린사람을늘가까이하시고자주이야기하여주십시오. 셋,어린사람에게경어를쓰시되늘부드럽게대해주십시오. 넷,어린사람에게수면과운동을충분히하게하여주십시오. 다섯,이발이나목욕같은것을때맞춰하도록하여주십시오. 여섯,나쁜구경을시키지마시고동물원에자주보내주십시오. 일곱,장가와시집보낼생각마시고사람답게만하여주십시오. ‘소년’이란무엇인가 어린이라는용어와더불어아동을바라보는관점을달리했다는점 에서눈여겨볼용어가또하나있는데,바로‘소년’이다.이당시소년 이라는용어가사용된곳은교과서에도실려우리에게도익숙한최남

042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선의 〈해에게서소년에게〉를꼽을수있겠다. 그렇다면이때어른들 은소년이란용어를어떤의미로사용했을까. 소년은겨레의새싹이자동시에민족해방과독립의등불이었고쇠 잔하는조국을받쳐야할주체였다. 암울한식민지배의그늘이짙어 지던현실에서벗어나려면구국운동을전개할수밖에없었는데,그러 려면아무래도거기에참여하는사람이많으면많을수록좋았다. 어 른들은소년들또한여기에참여하길바랐고,그런이유로당시소년 의개념은지금의아동이란연령대보다는광범위했다. 구체적으로보자면당시남자는 15세전후에혼인을했으며, 20세 전후의연령까지도소년이라고불렀기에 ‘수염난아이’ ‘아이어른’ 을지칭하는개념이라할수있겠다.그렇다보니아무래도사람마다용 어의규정도미세하게달랐는데, 최남선은 15세전후의연령을, 춘원 이광수는 15세전후의고등학생또는 20세내외전문학생의연령집 단을소년이라칭했다. 반면김기전은소년을 ‘20세이하의사람’으 로칭했다. 일제강점기에발족한조선소년군도가입및활동연령의 범위를 8세에서 20세까지로정함으로써당시소년이란용어가 20세 이내의인구집단도포함하는개념이었음을알수있다. 오늘날의청 소년혹은청년과도겹친부분이있다.정리하자면소년이란연령범 주와개념은오늘날법적기준으로볼때아동의연령범주(18세미만) 는물론이고청소년의범주(9세이상부터 24세이하)까지이르는폭넓 은개념이었다고할수있다. 여기서도마찬가지로‘왜?’라는의문이생긴다.도대체이같이‘소

043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년’이라는용어를만들어사용해야했던이유는무엇일까. 우선적으 로 성장세대를 지칭하는 범용적 용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년이 란용어는구한말부터전세계적인흐름으로파급되어가던계몽운동 의한흐름을국내에서적극수용하는차원에서최남선과같은계몽 주의자들에의해사용되기시작했다. 이당시학교에들어가지못하 는아동이더많았는데, ‘학생’이아닌이들을교육하여사회적인지 위를획득하게하고,특히국권을상실한이후에는교육을통하여구 국운동을전개할독립의주체로설정하기위해서소년이란용어는필 요했다.민족주의자들은여기에되도록많은성장세대가참여하길바 랐다. 반면일제는중앙집권적통제를강화하고자우민화정책을실시했 는데,이를위해조선인들의교육기회를억제하고자했다.동시에일 본인과친일인사들에게는고등교육의기회를제공하면서학력에따 른고용과임금상의차별을제도화하는등속이뻔히보이는이중적 잣대를들이댔다. 결론적으로보면교육을통한구국운동을펼치고자한사람들은성 장세대의연령을최대한넓게잡으려했다면,일제는참여인원을선 별해가급적적은인원이교육을받게했다는점이다.이러한열악한 상황에서도소년의연령범주는넓어졌고,바로이지점에근대소년 운동이태동하고출현하게된배경이있다. 이처럼아동을지칭하는 용어또한치열한역사적갈등의결과물이었다.

044 대한민국아동권리 100년사 전통사회에서아동이받아야했던차별 이처럼소년운동의일환으로잡지가발간되고,전통사회와다른시 각으로아동을바라보는관점이등장한점은의미있는일이다.그러 나사회구성원모두에게이런가치관이공유되고공감을받은것은 아니었기에대부분의아동은여전히전통적아동관에의해다뤄졌다. 유교사상의영향으로아직도자식이부모의소유물이라는사고가 뿌리깊게자리잡고있었으며,아동은독자적인인격체가아니라불 완전하고미숙한존재로당연히어른의보호와지도를받아야하는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장유유서 윤리관에 의해 성인은 아동을 가르치는윗사람이고,아동은성인을공경하고무조건순종해야하는 아랫사람으로인식되었다. 즉아동은가정, 특히아버지에게절대복 종해야하는존재였다. 이러한경향은 1921년일제가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일본민법의친권제도를우리나라에적용하면서더욱심화 된다. 가장인아버지의자녀에대한지배권은절대적인가치였으며, 이로써아동은공식적으로부모의소유물로여겨지게된다.뒷장에서 자세히서술하겠지만이는해방후한국민법에도그대로남아아동 들을옥죄게된다.의복에서도그러한관점을발견할수있는데,전통 사회에서아동은그저성인이입는옷을크기만줄여그대로입어야 했다. 아동이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수있다. 이보다더큰문제는따로있었다. 앞서살펴본대로한국의여러

045 한국의전통적아동관: 전통과근대의만남 전통적아동관에서도아동의잉태, 출산, 양육을중요시하는일부아 동존중사상을확인할수있다.하지만이당시아동을바라보는기준 은어디까지나 ‘일을할수있느냐’에맞춰져있었다. 농경사회에서 가장중요한건바로노동력이었기때문이다.가족수의증가는곧노 동력의증가를의미했으므로한사람이라도더일손을보태노동의고 단함을덜어주는게무엇보다중요했다.때문에이당시일정한노동력 을발휘할수있을만큼자란아동은바로어른으로취급되었다. 따라 서자녀를많이낳는일이매우가치있었으며,혼인한남성은아내를 새로운노동력으로데려와가족의노동력을증가시킬수있었다. 또한아동은가계를계승하기위한존재였으며이때문에무수한 차별이발생했다.출생순위에따른차별,적서차별,남녀차별이존재 했다. 그중에서남녀차별을빼놓고얘기할수없는데전통사회특히, 조선후기에접어들면서남아는여아보다가치있는존재였다. 남아 는가통을이어가면서가문을일으키는기둥이자대들보였다.따라서 가족의모든자원은남아에게만투자되었으며이들은벼슬길에올라 가문의명예를높이도록요구받았다. 장자에대한기대와요구가가 장컸고,차남이나그아래순위의아들에게도그런기회와의무가주 어졌다.즉당시에는장남,차남이하의남아,여아순서로자원이배 분되는차별이흔한일이었다.어릴때〈흥부전〉을보면서왜형인놀 부는부자인데동생인흥부는찢어지게가난한지의문을가졌던사람 들이많을텐데,이는바로놀부가장자여서재산을다차지한탓이다. 그러다보니여아의경우필연적으로차별받았다. 혼인을하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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